詩다움

다림질하는 여자 [박형준]

초록여신 2011. 9. 26. 10:04

 

 

 

 

 

 

 

 

 

 

 

한순간의 의지에 집중된

그녀의 어깨는 사원처럼 단단하다

식탁에 바랜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굵어진 손마디 속 우물

여자는 오므라진 꽃을 피운다

우물 속 파문을 기억해내려 꽃을 피운다

동심원의 중심에서

별을 핥는 짐승 한 마리

그녀의 손등에 뛰어오른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여자의 손등에도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그녀의 어깨까지 줄기가 뻗어 오른다

 

 

식탁에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여자는 다림질을 한다

손등에 새겨진 검버섯

우물 속처럼 깊다

그 속에서 가끔씩 파문이 인다

먼지와 공기까지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혼자 사는 여자는 꽃을 피운다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흐릿해진 시간이 곱게 펴진다

밤의 창문에 달이 떠오르면

그녀의 어깨에서 줄기가 뻗어 오르고

짐승이 매달려 논다

뜰에 바람이 지나가고

열매가 익는 밤

여자의 어깨 위에서 짐승이 내려와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엔 달 흔적이 선명해진다

흐릿해진 시간이 펴진다 달에는 우물이 있고

그 속에는 짐승이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가끔씩 더운 김이 달 그늘에 서린다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문학과 지성사, 201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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