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ㅡ어떤 개의 나이
'푸른 밤공기'라고 썼어. 너에게 쓰는 첫 편지, 첫 문장.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의 저편으로 텅 빈 버스가 지나가고 풀벌레 우는 소리. 쓰르륵, 싹싹. 고무지우개 지나가는 소리. 살살 종이가 벗겨질 강도의 초여름 올망대 뿌리를 캐는 어떤 손. 미끈한 논바닥을 긁는 삽의 느낌. 너에게 쓰는 첫 편지, 첫 문장의, 1만 개의 풍선이 한꺼번에 5월의 운동장 하늘 위로 풀어지는 소리. '지겹다'는 말을 잘 쓰는 지금으로선 그 첫 문장이 안드로메다처럼 낯설고 멀다. N극과 S극이 한 몸에 있는 막대자석 같은 그 고무지우개. 내가 처음으로 '푸른 밤공기'라고 쓸 수 있었던 그 저녁. 어쩌면 밤, 아니면 새벽, 혹은 안개. 지우다 말고 쓰고, 스다 말고 지우고. 그래서 너덜너덜 해진 어떤 종이, 찰과상 입은 종이. 피 대신 어둠, 뚝뚝 부러지는 연필심. 썼어. 그래, 썼지. 쓰고 또 쓰고. 지웠어. 그래, 지웠지. 다만 벗겨진 종이. 나 대신 나이를 먹는 종이. 어떤 개의 나이.
*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 민음사, 201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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