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던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 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 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의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 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내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 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 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스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 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 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 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이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 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그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러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 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 단편집과 중론,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 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조각들을 모아
새하얀 달에 비추면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집으로 돌아갔대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 들, 강을 지나
달아났다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훔쳐 가는 노래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 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망각은 없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증오하던 이가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 내 몸이 되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가 죽어
그는 강이 되었다
그는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부드러운 머릿결이
모든 계절에 과일과 별의 향기를 뿌리며 네 개의 강으로 지나갔다
어린 시절 읽었던 『천일야화』 속에서 어느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었다
그들은 물을 따라 허락 없이 흘러 다녔다 그래서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그는 죽었다
태어나 정치가가 되었다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
그를 정치가로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것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
거기는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꿀, 나의 담즙, 나의 거기
어린 시절 『천일야화』속에서 어느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었다 강은 죽었다가
곧 태어나 내 몸이 되어 올 것이다
신비한 질병과 미지의 악취를 릴레이 주자의 날쌘 팔다리처럼 달고서
어떤 시절에 어느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였다 한때 그들은 제 생각을 따라
텅 빈 광장으로 물처럼 흘러갔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 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 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대접해주는 예절 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 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 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 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 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놓았나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든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 2011 제56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현대문학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길 [정호승] (0) | 2011.01.21 |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0) | 2011.01.21 |
가면 우울증 [강기원] (0) | 2011.01.05 |
폭설 [정호승] (0) | 2011.01.05 |
아바타 [강기원] (0) | 2011.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