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가을의 시 [장석주]

초록여신 2010. 8. 21. 07:31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을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슬픔을 얹어 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서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산 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그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 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 몽해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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