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나는
짧게 살겠다.
밤사이 거센 비바람 속에
휘어지고 눕혀진 굴종.
난초와 꽃가지나 풀꽃 쑥부쟁이,
누가 말해준 것일까
한낮이 되기도 전에
꼿꼿이 다시 일어서는 힘.
길도 잘 모르는 힘의 밑동이
모든 것 안고 또 감싸 안고
뜰을 뒤지며 따뜻해지네.
구차하지만 다 끝나기 전에
길게는 한 십 년쯤 후,
그래도 내 지상의 어느 날 중에
당신에게 머리 숙이고 몰입하겠다.
가뭄이 와도 기죽지 않고
몇 광년의 속도가 세상을 보아도
몸은 바닥을 뒤집으며
그늘을 일으켜 세우고
변방의 속살까지 부추기면서
수줍음 한 송이 진 자리에
흰 꽃씨를 몇 개씩 내가 심겠다.
* 하늘의 맨살, 문학과 지성사, 2010. 5. 7.
……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정박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는 20대에 무작정 떠났다. 너무 멀리 왔나 싶었는데 사람 구실을 핑계로 세월을 탕진하고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서울 친구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놀리는, 악어와 물새와 도마뱀과 원색의 꽃이 침묵 속에서 자생하는 낯선 곳에 와 있었다. 이곳에 산 지도 한 10년이 되어가니 정박했던 배가 다시 떠나자고 서둔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배도 헐어서 순항만을 바라는 나이는 지난 것 같다.
이별을 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싱겁게 서로 만나 반기는 것이 아니라 이별이 동반되어야 아름다운 사랑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내 동생을 이 세상에서 잃은 것일까. 그러나 희망은 과거를 정화시킨다는 말을 믿는다.
내가 외롭다고 허우적거렸던 젊은 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구명대를 잡듯 시를 잡았다. 그렇게 시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외국에 나와 모국어와 오래 떨어져 살았던 나는, 처음부터 좋은 시인의 조건이나 틀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내 시에 대해 누구의 훈수나 충고를 들어볼 기회가 없어 혼자 거칠게 자란 시들. 그 흔한 물풀도 수십 년 딴 물에서만 살다 보면 그 맛과 색과 모양이 달라진다니, 비록 거친 이름일지라도 시의 영지를 넓히려 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ㅡ시집 뒷표지글, <시인의 산문> 중에서.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유리창 [최정례] (0) | 2010.06.28 |
---|---|
사물 A와 B [송재학] (0) | 2010.06.28 |
펜은 삽보다 가볍다 [이선영] (0) | 2010.06.25 |
청설모 [이선영] (0) | 2010.06.25 |
냇물에 철조망 [최정례] (0) | 2010.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