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천년 동안의 사랑 [이대흠]

초록여신 2010. 2. 7. 21:11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에 갔네 빨리 온 찬바람에 말라 쪼그라진 나뭇잎들

잎들은 저마다 곱게 물들길 원했을 것이나

계절은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네

그래도 끝끝내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을 보며 그 감잎처럼 저물어가는 그녀에게

사랑을 말하진 못했네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나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언제 지은 절인지

누가 지은 절인지 알 수가 없어

더 믿음이 가는 돌부처들 지나 와불 뵈러 가는 길

하필 머슴 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이 있고 머슴 있냐고

우리는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네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은 말이 없고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때

나는 잠시 와불이 되어 그녀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네

아주 잠깐의 천년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하였네

처음엔 너럭바위였다고 그러나 손톱으로 두두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울더라고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하였네

오래된 나무의 뿌리는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발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네

그 뿌리 천년의 세월을 다 발아들이면

돌이 되겠지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내지 못하는 돌이 되겠지

나는 천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네

나무의 가지들처럼 엉킨 기억의 끝 어디쯤에

천년 전 기억이 맺혀 있을 것인데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련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네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나를 보던 그녀

나는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그녀를 부축하였네

나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네

나는 절인 배추처럼 젖은 목소리로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 묻는 말 따위나 하였네

처음이 아닌 것 같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를 빠져나왔네

천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 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도 잊고

운주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네

 

 

 

 

* 귀가 서럽다, 창비(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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