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꿈이 쓸쓸해진다. 서로 다른 띠 두른 악몽들이 도처에 출몰해도 조그만 옥호 달고 파전에 술 파는 집들이 숨어 있는 골목들이 끝나고, 도시 변두리, 마지막 공연 끝낸 곡마단이 하늘 덮었던 천막을 막 거둔 정경. 북소리와 피리소리 사라진 반쯤 뜯긴 무대와 반쯤 어두워진 하늘, 둥근 테이블 주위에 접이의자 몇이 둘러앉아 있는 장면. 언제 나타났는지 어릿광대 옷에 뿔테안경 낀 성성(猩猩)이가 외서(外書) 하나를 옆구리에 낀 채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상자 위에 올라앉아 무연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만 석굴 속에서 참선하게 해달라는 내 청을 주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곳은 거사 같은 분이 밤을 보낼 곳이 못 됩니다. 젊었을 때부터 돌과 함께 숨을 쉬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돌 빛에 큰 병들지요.'
손전등 빛 속 바위들의 감촉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속삭였다. 무(無)가 채 들어와 박히기 전 무 생각의 화강암 무늬들! 그러나 주지는 한번 살펴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얼굴을 했고, 바위들은 말을 삼가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굴 밖에는 바글바글한 햇살, 기다렸다는 듯 참으아리가 덩굴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주 내밀자 몸 한구석이 저려왔다.
* 겨울밤 0시 5분 / 현대문학(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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