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外界

[스크랩] 꼭 읽어보세요..(공교육성공사례-최우수작)

초록여신 2010. 2. 3. 14:44

 

이 땅의 여느 엄마들처럼 저도 자녀양육에 마음 조리며 두 자녀를 길렀다. ‘아이들을어떻게 양육하고 교육시킬까’하는 현실 앞에서 저 역시 많이 아파하고 고민했다.주변에서 들리는 자녀교육비는 나를 두렵게 만들었고, 학원을 쫓아다니며 수많은 사교육을 받을 우리 두 아이를 생각하니 애처롭기까지 했다.


결혼초기에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었는데, 첫째(아들)는 시어머니께 맡기고, 둘째(딸)는이웃집 아주머니께 맡겼다. 둘째가 두 돌이 지날 무렵 아이를 돌봐주시던 아주머니께서다리를 다쳐 입원하시는 바람에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는데, 어린이집에 다닌 지 11개월 쯤 부터 딸아이의 머리에 부스럼이 생겨 좀처럼 낫지 않았다. 이름난 피부과를 찾아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다. 아이는 독한 피부과 약으로 인해 밥도 잘 먹지를 못했다. 원인은 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두 돌이 갓 지난 아이가 아침 일찍부터 가족과 떨어져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서 지내는 것이 무리였다. 친정어머니께서 아시고 야단을 치셨다. “자식 잘 키우는 것이 최고다. 내 나이 되면 남는 것은 자식뿐이다.”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결단을 촉구하셨다.


당시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저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 가정들이그렇듯이 남편 혼자 벌어 두 명의 자녀를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하기는 역부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마다 힘들어 하는 아이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회사를 나가지 않고 종일 집에 있는 나를 보고 아이들이 뛸 듯이 좋아했다. 밖에서 놀다가도 수시로 집에 올라와서 엄마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놀이터로 내려가 놀았다. 특히 둘째는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엄마 집에 있어요.” “우리 엄마 집에 있데이~”하면서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이들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결단이 참으로 잘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살고 있던 아파트가 재건축이 시작되어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시골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다는 남편의 뜻대로 재건축이 마무리 될 때까지 시골에 나가서 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1995년 늦은 가을에 대구 근교인 경산시 진량읍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주 하게 되었다. 시골이라도 생활은 아파트에서 하니까 크게 불편함이 없었고, 밖에 나오면 들판이나 숲을 접할 수 있어서 아이들과 산책하기에 좋았다.


직장을 다닐 때도 저는 자녀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퇴근해서 밥해먹고 청소며 빨래 등으로 지쳐도 아이들에게 책 읽어 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니 아이들과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어린 나이에 엄마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한이 되었든지 둘째는 밖에서 노는 것보다 엄마와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자녀양육을 위해 직장까지 그만 둔 마당에 자녀들은 꼭 잘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넉넉지 않은 남편의 월급으로 엄청난 사교육비를 투자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아이들 손잡고 들판을 산보하면서 혼자 생각했다. ‘정말 자녀양육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야만 할까?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조기교육으로 몰아넣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옛날 부모님들은 사교육 없이도 자녀를 잘 키우셨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맞벌이는 못해도 자녀교육은 돈 들이지 않고 감당해 보자.’고 굳게 결심했다. 남편도 나의 결심에 기뻐하면서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셨다. 우선 전문가들의 양육 경험과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여러 권의 자녀양육 지침서를 읽었고, 또 EBS교육방송을 비롯해 여러 방송 매체에서 주관하는 자녀양육 특강을 빠짐없이 시청했다. 시골에도 조기교육 열풍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시보다는 훨씬 덜했다. 그래서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껏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


시골로 이주한 다음 해에 큰 아이가 현흥초등학교(경산시 압량면 현흥리)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어른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초등학교 저학년이도보로 가기는 먼 거리였지만, 아이들은 걸어서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개구리도 잡고 메뚜기도 잡으면서 도시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시골의 정취를 즐겼다. 첫째가 허약해보여도 지금까지 거의 아픈 적이 없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 6년 동안 들길을 걸으면서 단련된 체력 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무렵 딸아이도 유치원을 보내야했는데 아파트 안에 있는 사립유치원은 가깝고 환경이 좋았지만 교육비가 너무 비쌌고, 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은 교육비가 싸고 교육과정이 안정적이었지만 거리가 멀었다. 유치원의 교육과정이 이벤트 위주로 편성되는 것보다 아이들의 인지발달에 맞춘 놀이와 관계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일 년 뒤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기에 멀지만 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둘째는 재미있고 즐겁게 유치원을 잘 다녔고, 다음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기대했던 대로 다른 친구들 보다 빨리 학교에 적응했다. 친구들에게 화장실도 안내해 주고, 급식소도 운동장도 낯설지 않은 곳이라 아주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스스로 계획을 세워 공부하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집에서 자학자습을 하도록 유도했다. 가족신문도 처음에 한 번 만 만들어주고, 그 다음 부터는 스스로 계획해서 만들도록 맡겼다. 처음에는 서툴고 어려워했지만 나중에는 잘 만들었다. 무엇보다 학교를 믿고 학교의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아이들을 지도했다. 아침 자습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한자를 한 자씩 가르쳐주셨는데, 큰 아이가 3학년 되면서 남편이 려워했신문에서 한자를 찾아 띄엄띄엄 읽었다. 한자까지 가르쳐 주는 학교는 읽었좋은 학교라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학교를 자랑했다. 그랬더니 한자 공부에 더욱 열심을 냈다. 방과 후에는 둘 다 풍물을 배웠다. 따로 학원이나 과외를 받지 않았으므로 방과 후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둘째는 5학년 때부터 운동부에 들어갔고, 달리기 선수로 시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두 아이가 집에 오면 언제나 맛있는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간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먼 길 잘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칭찬해주었다. 간식을 먹고 나면 바로 EBS교육방송을 시청했다. 큰 아이와 둘째는 학년이 한 학년 차이나지만 항상 같이 시청하도록 했다. 둘째가 진도를 나갈 때 첫째가 같이 들으면 복습이 되었고, 큰 아이가 진도를 나갈 때 둘째는 옆에서 예습을 하게 되었다. EBS교육방송은 학년에 맞추어 흥미롭게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재미있어했다. 특히 과학은 실제로 실험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니까 책을 보면서 문제만푸는 학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영어는 녹화를 해뒀다가 여러 번반복해서 시청하도록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잘 키워보겠다고 마음먹고 이리저리 정보를 찾아다니다가 EBS교육방송을 접하게 되었다. 학교교육과정에 맞추어 자학자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학습도우미라 생각했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우리 집 TV채널은 특별한 경우(축구중계 등)를 제외하고는 늘 EBS교육방송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학년이 되어 아이들의 하교가 늦어져 방송을 바로 시청할 수 없을 때는 예약녹화를 했다가 청취하게 했다. 많은 아이들이 하교한 후 밖에서 시간을 보낼 동안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EBS시청과 숙제가 끝나면 자유롭게 책을 읽었다. 큰 아이는 역사책을 좋아했고, 둘째는 과학과 문학책을 좋아했다. 저학년 때는 주로 만화로 된 책을 읽었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글자로 된 책을 많이 읽게 했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서점에 들러 자기들이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게 함으로써 동기를 유발했다. 학원에 가지 않았고 TV도 보지 않았기에 저녁 시간은 책읽기에 넉넉했다. 아이들과 같이 우리 부부도 덩달아 책을 읽었고, 종종 각자 읽은 책을 소개하면서 느낀 점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독서는 지혜와 지식을 스스로 얻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다.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연지 못에 자주 산보를 나갔다. 시골 저수지 치고는 규모가 커서 둑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다. 철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 속에서 조물주의 섬세한 솜씨를 마음껏 느끼며 노래했다. 방학이 되면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났다. 제가 직장을 다닐 때는 남편과 일정을 맞추기가 힘들었지만, 직장을 그만 둔 후로는 언제나 일주일 정도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이 저학년 일 때는 주로 남편이 장소와 일정을 정했지만,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여행 일정과 장소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인터넷을 통해 지도와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하는 것까지 모두 아이들과 함께 준비했다. 장소는 대체로 사람들이 크게 붐비지 않는 조용한 곳을 택했다. 여름에는 강이나 계곡에서 텐트를 쳤고, 겨울에는 주로 다른 지방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탐방했다.


첫째(아들)는 한때 게임에 빠졌다. 우리 부부가 없는 날에는 종일 게임을 하고, 어떤 날은점심도 굶고 게임에 열중했다. 게임에 빠지게 되니 EBS방송이나 숙제도 근성으로 하고책 읽는 것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몇 번 타이르고 야단을 쳐도 그때뿐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아들을 설득해 아예 게임기를 없애버렸다. 게임기를 없앤 후 일주일 정도 금단 증상을 보이더니 다시 책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엄청난 집중력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아이의 마음을 잘 잡아준 것이 기초학력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 같다. 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몇 번 홍역을 치렀다.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해 새로 구입해준 컴퓨터로 종종 밤새워 게임을 했다. 컴퓨터를 거실에 옳기고 서야 겨우 문제가 해결되었다. 큰 아이는 집중력이 있는 반면 한 곳에 빠지면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 번은 인터넷 토론방에서 반지의 제왕에 대해 토론하다가 다음 날 시험을 망친 경우도 있었다.


아파트 재건축 할 동안만 시골에 살기로 마음먹고 시골로 이사를 왔는데 재건축 사업을 맡았던 시공업체가 부도나면서 공사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고 시간만 흘러갔다. 도시 근교 시골학교의 특징은 고학년이 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도시로 전학을 가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1학년 때 여섯 반 이었던 학급이 6학년이 되니 한 학급으로 줄어 있었다. 아파트의 아이들도 밀물처럼 도시로 빠져나갔다. 그 무렵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 오늘도 우리 반에 ○○가 전학 갔어. 이제 26명 남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이 말을 듣는 나는 매우 불안했다. 친구들이나 친척들도 전화해서 더 늦기 전에 도시로 이사하라고 강권했다.


이사 가는 문제로 남편과 다툼이 잦아졌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전세를 얻어 대구로 이사해야한다는 생각이었고, 남편은 시골에서도 공부하고 대학에 들어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자주 이 문제로 다투니 어느 날 첫째가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 때문에 이사하지 마셔요. 저는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할 수 있어요.” 난데없는 아들의 신앙적인 말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해왔지 않니? 그리고 아이보다 믿음이 없어서야 어떻게 자녀를 키우겠어.’ ‘어차피 시골에서 시작했는데 여기서 끝까지 해보자.’ 그래서 이사를 포기하게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진량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영어와 수학에 비중을 두고 공부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학원이나 과외를 시키지는 않았다. 주로 집에서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 하고, 인터넷 강의(EBS)를 통해 선행학습을 시켰다. 학교수업과 연관시키기 위해 학교진도보다 조금 앞서게 인터넷 강의를 듣게 했다. 인터넷 강의는 필요한 부분을 반복해서 학습할 수 있기에 매우 좋았다. 어려운 내용을 반복해서 들으므로 완전학습을 할 수 있었다. 학교를 믿고 자녀들이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아이들 앞에서 학교에 대한 좋은 이야기만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강의를 듣고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잘되어 있어서 둘 다 공부에 자신감을 가졌다. 바지런하고 계획성 있는 둘째는 1학년 때부터 줄곧 선두를 유지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수학선생님 눈에 띄었던지 종종 수학 문제지를 받아왔고, 딸은 문제 푸는 것을 아주 재미있어 했다. 혼자서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다음 날 수학선생님을 찾아가 물었다. 이렇게 해서 문제집한 권을 다 풀면 또 다른 문제집을 받아왔다. “벌써 다 풀었니? 얘 너는 수학으로 성공하겠다.” 수학 선생님의 칭찬에 아이는 신이 나서 밥 먹는 것도 잊고 문제를 풀었다. 큰 아이가 2학년, 둘째가 1학년일 때 시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수학영재반에 선발되어 매 주 토요일 오후에는 시교육청에 가서 수업을 받았고, 다음 해 둘째는 경상북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수학 영재반에 뽑혀 매 주 토요일 포항에 있는 경북 과학 고등학교에 가서 수강하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수준 높은 학습 경험과 꿈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둘째는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과학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부모들이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 일찍부터 사교육을 얼마나 많이 시키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만류했다. “주현아, 굳이 특목고에 가지 않아도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단다.” 특목고에 지원했다가 낙방하면 그 충격이 클 것이고, 설령 합격한다해도 대학진학에 크게 유리할 것이 없다면서 남편도 말렸다. 그러나 둘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래서 도시에 있는 학생들이 특목고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혹 실패해도 실망하지 말고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받고 허락했다.


아무리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이 잘되어있다 해도 입시를 8개월 정도 남기고 특목고를 준비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선을 다해 밀어주기로 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일주일에 두 번 수학 과외를 받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때까지 한 번도 과외를 시켜 본 적이 없었기에 과외비가 그렇게 비싼 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도 몇 개월 남지 않았으니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과외를 시작했다. 그런데 두 번 과외를 받고 온 딸아이가 혼자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며 과외를 받지 않겠다고 해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학교 담임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정규수업을 마치면 바로 하교해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저녁을 먹은 후에 아파트 옆에 있는 영남 신학교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혼자 공부했다. 나는 틈틈이 서점에 들러 수학경시대회 문제집을 구해왔고, 남편도 인터넷을 통해 과학과 수학책을 구해 주었다. 혼자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다음 날 학교선생님을 찾아가면 언제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셨고, 어떤 때는 연구해서 알려주겠다며 다음 날 오라고 하셨다. 이렇게 공부해서 경북과학고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다. 시험 치는 당일에도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시험보라고 격려했다. (솔직히 우리 부부는 크게 기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합격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냈다는 것이 더욱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진량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웃에 있는 하양 무학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1학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교공부에 충실히 했다. 집에 있으면 컴퓨터와 TV시청에 시간을 많이 뺏기는 스타일이지만, 고등학교 기숙사에서는 이런 유혹이 아예 없어 좋았다. 친구를 많이 사귀지는 않지만 깊이 사귀는 성격이라 기숙사와 형설반(1, 2, 3학년 우수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방)에서 격 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들과 선후배를 얻었다. 같이 먹고 자고 공부하면서 때론 선의의 경쟁을 하고 또 서로 위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시골 각 지역에서 모인 학생들이라 아무래도 순진하고 순수했다. 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다. 학교를 믿고 선생님의 지도대로 학교수업과 자학자습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했다. 영어와 수학 공부는 학교 진도에 충실하면서 주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PMP를 구입해서 EBSi에서 파일을 다운받아 학교에서 듣고 주말에 집에 오면 다시 파일을 바꾸어 갔다. 3학년이 되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것들(영화, 독서, 토론)을 뒤로 미루고 학업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목표했던 연세대학교 상경계열로 진학하게 되었다.


자학자습 하는데 자신감을 얻은 딸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 과학 고등학교이기에 수학과 과학과목만 준비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입학해보니 영어가 문제였다. 대부분의 과학고 학생들은 중학교 때 텝스(TEPS)를 준비해서 이미 KAIST(한국과학기술원)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영어점수를 취득해 있었는데, 우리 아이는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텝스를 접했다. 암기력이 약해 영어공부를 어려워했지만끈질기게 공부했고, 수학∥도 선행이 되어있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결국 잘 극복하고 2년 만에 KAIST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한 해에 두 아이가 모두 목표했던 대학에 들어간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사교육 없이 학교 공부에 충실히 하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기에 더욱 감격스러웠다. 지금도자녀교육에 마음 아파하며, 엄청난 사교육비로 힘들어 하는 이 시대의 많은 부모님들과 저의 작은 경험을 나누고 싶어 이렇게 수기를 쓰게 되었다. 아울러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며 친절하게 가르쳐주신 시골의 여러 선생님들과 늘 좋은 프로그램으로 학습도우미가 되어 주신 EBS교육방송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출처 : 2009공교육성공사례수기 공모전 - 학생지도분야 최우수상 수상작품






출처 : 사교육비 절약하는 학습법
글쓴이 : 바라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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