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6
ㅡ 탁란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기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간 어머니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 몽해항로 / 민음사, 2010. 1. 8.
나는 시인의 말을 수긍하게 된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그렇다면, 지금 보이는 것 ㅡ 멋있고 화려하며 그럴 듯한 것들은 거죽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복사꽃"이란 복사꽃이면서 복사된 꽃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모조품이고 가짜이며 껍데기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대적으로 횡행하는 것들은 늘 아류들이거나, 경박한 유행이 만들어 낸 호사주의(好事主義)일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탁란(濁卵)의 계절"이다. 노른자위가 흐린 것들이 늘 득세해 왔고, 득세하고 있으며 또 득세할 것이다.
좋은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다 함은 앞으로 그런 시절이 올 것이고, 또 와야만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그 호시절이 지금의 일이 아니라는 절망과 더불어, 그러나 그것이 미래 세대의 것이 되리라는 희망이 혼재해 있다. 그것은 멀리 있기에 아스라한 바람이 되고, 이 바람을 스스로 실행해야 할 것이기에 버거운 책무가 된다. 그것은 품을 수 있는 어떤 희망이 아니라 품지 않을 수 없는, 지금 여기를 버텨 내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전망이다. 시인이 제편으로 삼는 것은 이처럼 모호한, 그래서 실낱같은, 그러나 없을 수는 없는 절박한 희망일 것이다.
희망을 구현하는 데는 물론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의 무리나 물질 혹은 어떤 당파성이 도움을 줄 때도 있다. 정치제도적 개혁은 이런 무리의 합법적 조직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에 어떤 파당성이 만약 있다면, 그것은 실현태가 아니라 잠재태, 이미 현실로서 구현된 것이 아닌 아직 구현되지 않는 가능성에 의지한다. 이 가능성은 지금 여기로부터 그 너머로 무한히 열려 있다. 이렇게 열려 있는 전체, 그것은 타자성의 이름이다. 개방성 속에서 시는 타자 ㅡ 구름과 감자와 송아지와 양쯔강과 뻐꾸기와 황해와 구름과 친교한다. 시는 이 무한한 타자성, 이 타자성의 가능성을 자기 지향의 근거로 삼는다.
시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혹시 편드는 게 있다면, 그것은 이 이름 없는 타자적 전체일 것이다. 이 전체적 타자성 속에서 시는 이 이외의 것에 열려 있고 또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시는 윤리적이고, 이 윤리성 속에서 정의롭다. 그러나 시의 진선미는, 그것이 타자로 열려 있기에, 완전히 개화하지는 못한다. 인간 삶의 이성적 질서는 항구적 형성의 와중에 있다.
「몽해항로」연작은, 그 상상력이 오늘 여기와 저기 저 너머, 구차한 생활과 이 생활의 지속, 북풍과 봄빛, 악취와 자유, 죽음과 그 너머의 관계를 예술적의 타자적 가능성 속에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절창(絶唱)이 아닐 수 없다. 타자적 가능성이란 곧 윤리적 가능성이다. 시인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추억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이 그리움을 지우며, 결의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몸짓이 시의 꿈이자 삶의 궤적이길 희구한다. 이러한 힘은 아마도 사랑에서 나올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을 장석주는 시에서 얻고, 이렇게 얻은 힘으로 자기 시간을 일구어 간다.
시의 전면적 투여란 아마도 시를 사는 데서 완성될 것이다. 시를 사는 것이 시의 궁극 목표라면, 장석주는 이런 목표에 다가간 시인으로 보인다. 그는 자벌레가 뽕잎 경(經)을 먹고 살 듯, 시경(詩經)을 씹으며 산다. 시를 쓰고 시를 행하며 시를 살아가는 것이다. 시는 장석주에게 시경이고 양생법이다. 오늘날처럼 철저하게 비시적으로 되어 버린 시대에 시의 감동을 말하기란 뒤떨어진 일로 보이지만, 나는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알 수 없는 파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 빛과 그늘을 헤아리면서도 과장 없이 서술하는 데서 올 것이다. 그리고 이 서술은 시를 사는 데로 수렴된다.
살아지는 시, 이 시의 포용에는 사랑이 녹아 있다. 감동은 아마도 이런 사랑을 확인하는 데서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서도, 그래서 '숭고'나 '장엄' 혹은 '수행'이란 말에 기대지 않고서도 이 삶을, 이 삶의 무궁무진함과 존귀함을 증거할 수 있을까?
아마도 시의 진실은 미래를 예비하고, 이 미래로 열려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시가 정의롭다면, 그것은 아직 실현 안 된 것의 정당성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러할 것이다. 시가 악취를 말하면서도 짧은 낮과 긴 밤을 견디는 것은, 그래서 시인이 응달진 곳을 바라보며 흔쾌히 오체투지하는 것은 이 드넓은 정당성 ㅡ 타자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확신의 형태로 자리하기보다는 삶의 원리로, 오늘을 견뎌 내는 생활의 힘으로 자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서 투쟁보다는 표현을 통해, 묘사가 아닌 노래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다. 오체투지하며 부르는 이 노래가 곧 삶 속에서 삶과 싸우고, 이 싸움 속에서 삶을 다시 껴안는 시의 방법이다.
시는 아직 오지 않은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이는 사랑의 방식이어야 한다. 이 사랑의 방식을 체현하고 있는 장석주의 시는 분명 오늘의 문자 위축 상황을 거스르는 소중한 노작(努作)이다.
ㅡ 문광훈(문학평론가.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 [작품 해설] 속시경(續詩經)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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