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김명기]

초록여신 2010. 2. 1. 18:43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달,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場판 한 귀퉁이, 낡은 철제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랜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얼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댔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므로......,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지막이 말해주었다.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 전당(2009)

 

 

 카스트로를 도와 쿠바를 해방시킨 혁명가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화자는 북평 장날 보았다.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린 티셔츠의 값을 물어보니 만 오천 원이라고 한다. 화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살 것을 망설이는데, 그러자 상인(초로의 여인)은 만 이천 원으로 깎아준다. 체 게바라는 서른아홉에 죽었는데 생각해보니 시인 자신의 나이와 동갑이 아닌가.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인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옷값이나 깎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회와 자책감이 두루 섞여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한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시장사람들의 인심,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느기는 동류의시그 티셔츠에 그려진 체 게바라의 생애를 떠올리며 느낀 부끄러움 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에 기반하여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쉼표로 연결되는 2개의 긴 문장이 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쉽다.

ㅡ 이승하(시인.중앙대 교수),[해설]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리얼리즘 정신과 시의 힘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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