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저지레의 가족사 [하종오]

초록여신 2009. 12. 18. 10:57

 

 

 

 

 

 

 

 

 

 

 

 

어린 애 시절 봄 마당에서 혼자 놀면서

할아비는 돌치기하다가 장독을 깼고

아비는 자치기하다가 바지랑대를 넘어뜨렸고

아들은 굴렁쇠 굴리다가 꽃을 망가뜨렸다

 

 

소년 시절 여름 장터에서 동무들과 어울리며

할아비는 물건 슬쩍하다가 들켜 거짓부렁을 했고

아비는 군말썽부리는 왈짜들에게 시비를 했고

아들은 맥장꾼들한테 핀잔 들으며 대거리를 했고

 

 

청년 시절 가을 들판에서 들일하며 술 마시다가 취하면

할아비는 들쥐들에게 삿대질을 했고

아비는 왜가리들에게 네굽질을 했고

아들은 참새들에게 갈개질을 했다

 

 

처자식이 생긴 후로 겨울에

할아비는 눈 안 오니 내년엔 흉년 든다고 뜬소문이나 냈고

아비는 물 길러오다가 엎질러 빙판길이나 냈고

아들은 군불지피다가 한눈팔아 초가지붕에 불이나 냈다

그러고도 후손들이 춘하추동 엇비슷한 저지레를 해대면

회초리를 들고 꾸지람하고 벌을 주는

점잖은 어른이 되어 살다가 너그러운 웃어른이 되어 죽었다

 

 

 

 

 

* 시안, 2009년 겨울호 ㅡ 오늘의 시와 시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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