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해질 무렵 집 앞에 앉아 [김사이]

초록여신 2009. 10. 4. 21:55

 

 

 

 

 

 

 

 

 

 

 

 

 

서른이 넘어서야

떠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홀로 떠나는 법을

마음의 빚이건 물질의 빚이건

뗄래야 뗄 수 없는 내 몸뚱이 비곗덩어리처럼

살수록 느는 건 빚이라

이사할 대마다 알게 모르게 늘어나는 짐들

박스 하나로 시작했던 타지에서의 삶이

트럭을 한 대 이상 불러야 할 정도로 나이를 먹어

누구나가 땅에 두 발 붙이고 살긴 하지만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내가 딛고 있는 두 발 왔다 갔다 하는 거리

이어진 선 안에서 더 벗어나지 못하는

점차 그 테두리 안으로 발목 잡혀 뿌리를 내리고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거나

희망도 절망도 가슴에 묻어버리고 살아간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가볍게 일어나서 뽀지게 놀다가 저녁엔 삭신이 욱신거려도 좋다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 하나만 있으면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까

나만 한 가방 하나와 내가 앉아 있으니

짐인지 가방인지 사람인지 경계가 없어져

동그란 덩어리 두 개 나란히 있는데

무엇을 버려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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