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링 위의 돼지 [김남호]

초록여신 2009. 9. 12. 22:59

 

 

 

 

 

 

 

 

 

 

어머니는 나를

뜨개질하다 말았다

꼬리 긴

개가 되고 싶었으나

불알만 커져버린 돼지

 

 

나를 들어올리다가

번번이 떨구는

저 짧고 엉성한

매듭

 

 

똥 묻은 주둥이로

똥구멍 쪽을 수시로 노려본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똥구멍이 밑에 감춘

수류탄 두 개

 

 

 

* 링 위의 돼지, 천년의 시작(2009. 09.)

 

 

 

  '링 위의 돼지'와 '나'와의 유비 관계에 의해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전말이 밝혀진다. "어머니"가 '나'를 키우는 일이  "뜨개질"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뜨개질"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결핍이다. 결핍 이전에 '나'가 원했던 것은 "꼬리 긴/개"였다. "어머니"가 바랐던 '나'의 모습이 "꼬리 긴/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뜨개질"의 중단으로 인해 '나'는 "불알만 커져버린 돼지"가 되고 말았다. 결핍으로 인해 '나'는 "개"에서 "돼지"로 변했다. 결핍이 왜곡을 낳았다. 심리적 작용으로서의 왜곡은 현실에서 왜상으로 형상화된다. "짧고 엉성한/매듭"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나'의 왜상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 왜상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들어올리다가/번번이 떨구는" "어머니"의 행위에서 "번번이"는 이 왜상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 사건임을 암시한다. 왜상은 이 세계의 결핍을 반드시, 그러나 사후적으로 증언한다. 남근의 부재 역시 결핍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ㅡ여태천(시인.동덕여대 교수>, [해설] 삶과 죽음에 관한 오해와 진실 중에서 발췌

 

 김남호 시인은 사물과 사물 사이를 거침없이 내왕할 뿐 아니라, 시의 본질인 <知 和 樂>을 매우 자연스럽게 운용하는 시인이다. 다시 말해서 <사이>, 그 접속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無縫의 天衣를 펼치는 시인이다. 그가 선택한 사물(대상)은 어김없이 <和而不同>의 <자리바꿈>을 감행한다. 그 전개는 우리에게 시를 쓰고 읽는 일이 놀랍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 그의 시어 선택의 적극성이 높은 해학으로 자리한다. 한 대목만 옮기기로 하자.
“지구를 한 바퀴 다 돌리려면 아직도/삼겹살 열두 판은 더 구워야 한다//뭉텅뭉텅 썩은 사과를 낳는 여학생들이/산부인과에서 쏟아져 나온다/산후에는 돼지족발 같은 게 좋대요!/족발 같은 게 치마 밑으로 자꾸 발을 밀어 넣고 있어요”
아울러 서정의 유약성 극복과 그로데스크의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대상의 함량증가 운동을 자칫 엉뚱한 것으로 폄하할 수도 있으나 그 넘나듦의 이미지에는 동일성의 브릿지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뛰어난 시의 독해력일 것이다. 그와 함께 갔던 칠불사였던가, 그곳의 <亞字房> 생각이 난다. 한번 불을 지피면 여간해서 식지 않는다는 그런 시의 운용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정진규(시인)

김남호의 시는 응축과 생략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 시학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그는 서정의 범주를 내파(內破)하면서, 핍진한 감각들을 환유적으로 발화하는 방식과 분열의 리얼리티 그리고 죽음의 상상력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그로 하여금 “못에 찔린 타이어처럼 악몽”(「눈만 뜨면」)을 꾸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막에도 피는 꽃이 있었다/그들은 거기가 사막인 줄 몰랐거나/자신이 꽃인 줄 모르는 것들이었다”(「끝이 휘어진 기억」)는 역설과 위반으로서의 전위(前衛)의 몫을 오롯이 감당해낸다.
“종이꽃이 핀다/꽃이 지자/주렁주렁 술잔이 열린다”(「넙죽넙죽」)에서처럼 돌변하는 인과성으로 이루어진 환유적 요소들은, 표면적으로는 시의 주제를 희석시키지만, 심층적으로는 세계의 여러 겹을 환기하면서 ‘환유의 재은유화’ 현상을 가져온다. 그렇게 그가 만나는 것들은 일그러지고 그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엄연하게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 마음들, 영혼들이다.
“난해한 것을 만나면 깨물어보는 버릇”(「치통을 앓는 그림엽서」)을 가진 그는 그렇게 “사라진 나를/한 점 한 점/긁어모으기 위해/엉금엉금 접시 위로/기어 올라가는/아침”(「레고」)을 맞곤 하는데, 이처럼 상식이나 순리보다는 불편하고도 섬세한 지적 개입을 요청하면서 펼쳐지는 김남호 시편은, 그만큼 우리의 고통과 불안의 운명을 환기하면서 역설의 활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낭만주의적 반동(reaction)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속물주의에 저항하는 미학적 정예주의(elitism)이기도 하다.
―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