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400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둥치도 가지고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積)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 유안진 민속시집 『알고(考)』
시인의 말
예술은 달려가는데 내 시는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차라리 뒷걸음치고 싶었다. 그렇게 썼던 편편이 이 분량이 되었다. 글로벌 시대를 퓨전식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 민속은 어느 새 아방가르드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내 학문이던 우리 민속을 시로 재음미해보는 것은 나의 태생적 촌순이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음양오행에 근거한 우리 민속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극락'이라는 현세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오면서도 초현실적 영성에 크게 의존적이었다. 비록 원형적이었으나 그 신비는 고등종교의 영성에는 물론, 앞으로 재탄생될 새로운 민속의 바탕이 될 수도 있으리라. 비슷한 생각에서 유진 오닐도 「밤으로의 긴 여로 」에서 과거는 현재이고, 오히려 미래라고 했으리라. T.S 엘리엇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영미문학의 미래」에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둘 다 미래의 시간 안에 있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으리라. 물론 더 오래된 명심보감은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과거부터 살피라고 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료 수집을 빚져온 2,000여 분의 어르신들께 깊은 감사를 느낀다. 시가 학문적인 연구서보다 쉽지 않겠지만, 문득 이 시집도 그 어르신들께 바쳐 올리고 싶다, 비록 어르신들의 영전이 허공일지라도.
해설을 써 주신 홍용희 교수님과 이번에도 시집을 만들어 주신 천년의시작 김태석 사장님과 김정웅 시인께 감사의 마음으로.
2009. 7. 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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