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지붕에 오르기 [정일근]

초록여신 2009. 6. 17. 05:58

 

 

 

 

 

 

 

 

 

 

 

 지붕에 오르면 못 친 곳을 골라 밟아야 한다. 양철지붕 위로 나를 불러올리며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발 아래는 가벼운 유년의 발길에도 한 장 종이처럼 그냥 찢어져버릴 것 같은 녹슨 양철지붕, 저 위를 어떻게 걸어갈까 두려움에 떨고 서 있는 어린 손자를 위해 그렇게 일러주셨다.

 

 

 녹슨 양철지붕 위에서 할아버지는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깨우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 떠나간 1970년, 새로 이주한 진해시 여좌동 산 번지, 양철지붕 아래는 일곱 평 반의 겨울바람 같은 남루와 빈 나뭇가지로 서서 밤마다 잠들지 못하며 흔들리던 아홉 가족,

 

 

 할아버지 가르쳐주신 못 길을 밟고 지붕의 끝에 오른 나는 즐거웠다. 눈 아래는 낮은 세상, 내게 높기만 했던 마을의 집과 담들이 엎드린 듯 낮게 펼쳐지고, 언젠가는 가보고 싶었던 철길의 먼 끝까지 바라보며 더 높은 지붕으로, 지붕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나는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병상에서 살아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아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 나는 침묵하고 만다. 지붕에 오르면 못 친 곳을 밟아야 한다. 할아버지 말씀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가르쳐줄 지붕의 길을 이제는 볼 수 없어 침묵하고 만다.

 

 

 못이 박힌 곳은 양철과 지붕을 이어주는 길, 못 친 곳을 밟고 오르면 녹슨 지붕의 끝에 닿을 수 있듯, 험한 곳에도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 나에게 가르쳐주셨지만, 무거운 삶의 무게로 지붕에 오르기만 꿈꾸었던 나는 여전히 유년의 지붕 끝에 불안하게 서 있었다.

 

 

 

 

*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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