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박이화
아파트 단지 한 복판에
딱히 주인 없는 살구나무를 밤낮으로 보며 살았다
꽃도 꽃이지만
탱탱한 열매가 속살처럼 말랑말랑 익어가는 것까지 향기롭던
보기만 해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침샘 가득 군침 고이게 했던 살구나무,
어쩌면 그 왁자한 우물가 풍문으로
살구꽃 피고 풋살구 익었는지 모를 일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바람 같은 염문이
살꾸꽃 다 떨어진 뒤에도 벌나비
한참 들락거리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매번 주인 없는 살구를
내 것인 양 먹은 벌로
내게도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그리움 생겼던 걸까?
생각만 해도 입 안 가득 군침 돌듯
브레지어 속에서 유선 싸르르 돌게 하던 그 사람
다시 살구꽃 피는 한 철
나는 또 시큼한 입덧처럼 그 사람 그립기만한데
살구나무 발전소
안 도 현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살구나무
함민복
동생이 내 동생이
꽃 핀 살구나무를 흔듭니다
큰 살구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동생만 흔들립니다.
동생의 팔을 잡고
동생을 흔들어주던 살구나무가
바람 불러 꽃 핀 가지를 흔들어주자
놀란 동생이 살구나무 꽉 붙잡아주려 힘을 씁니다.
살구 & 도브
김경선
그 방에 갇힌 여자,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왔을 때 봉긋한 가슴에서 살구향이 났다 거실 끄트머리 그녀의 방, 아버지와 오빠는 틈만 나면 그 방을 들락거렸다
헤픈 그녀, 아무에게나 몸을 열었다 저녁마다 아버지의 머리칼 위에 오빠의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다 늘 축축하게 젖어 살굿빛 매끈한 실루엣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무새가 흐트러진 그녀에게 어머니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때마다 목욕탕 바닥에 멍하니 앉아 젖은 몸을 말리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수문통으로 흘러와 몸을 팔던 섬 처녀 계옥이도 은은한 살구향이 났었다 영혼이 닳아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코쟁이만 믿은 계옥이, 초청장을 약속한 깜둥이는 미국으로 돌아가 콧대 높은 여자와 결혼했다 몰래 낳은 까만 아이를 수문통에 빠뜨려버리고 형사에게 붙들려간 계옥이 정신을 놔버렸다는 소문이 거품처럼 무성했다 럭키상회에 수많은 계옥이가 진열되었다
럭키마트에서 살빛이 희고 이목구비 시원한 서구적인 여자, 도브를 고른다 오늘따라 풋풋한 살구향 계옥이가 내 손을 빠져 나간다
오래된 살구나무
마경덕
꽃 터지듯, 터지는 사람을 안다. 나뭇가지에 올려진
봄은 짧았다
발등으로 쏟아진 이름을 한 이레 바라보면
말라죽은 가지에 푸른 젖꼭지가 돋고
배고픈 봄이 건너와,
다닥다닥 들러붙어
죽은 살구나무 젖을 빤다
오래 전 한 여자
저 나무에 목을 달고,
흙 살구를 주워 먹은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옛 살구나무에 묶여, 늙어버린 봄
쉿!
끈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꽃그늘에 숨어 운다
베어진 나무 아래 한나절, 누군가 울다간다
살구나무
손순미
이발사 김씨가 살구나무에 목매달았다
죽은 개를 파묻었다
고양이를 파묻었다
슬픔이란 슬픔은 살구나무에 다 파묻었다
봄마다 살구나무
그 슬픔들을 추모하여
조화弔花 한다발 피워 올렸다
살구나무 열심으로 슬픔을 익혔다
어느 날 살구 사리알 주렁주렁 열렸다
슬픔은 완성되었다
살구꽃
송찬호
살구꽃이 잠깐 피었다 졌다
살구꽃 양산을
사지는 않고
그냥 가격만 물어보고
슬그머니 접어 내려놓듯이
정말 우리는 살구꽃이 잠깐이라는 걸 안다
봄의 절정인 어느날
살구꽃이 벌들과
혼인여행을 떠나버리면,
남은 살구나무는 꽃이 없어도
그게 누구네 나무라는 걸 훤히 알듯이
재봉틀 밟는 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수선집이고
종일 망치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철공소라는 걸 멀리서도 알고 있듯이
살구나무와 연애 한 번 하지 않아도
살구나무가 입은 속옷이
연분홍 빤쓰라는 걸
속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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