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조용미
꽃 피운 앵두나무 앞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다
내가 지금 꽃나무 앞에 이토록 오래 서 있는 까닭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부암동 自沙室은 숲 그늘 깊어
물 없고 풀만 파릇한 연못과 돌계단과 주춧돌 몇 남아 있는 곳
한 나무는 꽃을 가득 피우고 섰고
꽃이 듬성한 나무는 나를 붙잡고 서 있다
이쪽과 한끝과 저쪽 한켠의 아래 서 있는
두 그루 꽃 피운 앵두나무는
나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아주 가깝지 않게 떨어져 있는데
바람 불면 다 떨구어버릴 꽃잎을 위태로이 달고 섰는
듬성듬성한 앵두나무 앞에서 나는
멀거니 저쪽 앵두나무를 바라보네
숨은 듯 있는 별서의 앵두나무 두 그루는
무슨 일도 없이 꽃을 피우고 있네
한 나무는 가득, 한 나무는 듬성듬성
나는 두 나무 사이의 한 지점으로 가서 가까운 꽃나무와
먼 꽃나무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네
앵두가 열리려면 저 꽃이 다 떨어져야 할 텐데
두 그루 앵두나무 사이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나는 어디에 물어야 할지
무슨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지 자꾸 물어본다
보리앵두를 먹는 법
이정록
앵두를 오래 먹는 법은 따 먹지 않는 거다
한 주먹 우물거려도 앵두씨나 가득할 것을
싸돌아다니는 닭들 목구멍이나 막히게 할 것을
툇마루에 그림자 하나 앉혀놓고 눈으로 먹는 거다
보리알만 해진 눈곱 곁에 앵두알 눈동자를 짝 지우는 거다
눈동자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의 노랫소리까지 받아먹는 거다
앵두뺨을 훔치는 소만 망종의 달빛까지 핥아먹는 거다
앵두뺨과 앵두이파리의 솜털이 내 귓불에도 돋아나게 하는 거다
그리하여 달빛앵두인 양 날 훔쳐보는 사람 하나 갖는 거다
나 몰라라 슬그머니 앵두이파리 뒤쪽에 숨어
혼자 날아온 새처럼 깃이나 다듬는 거다
처음 만나는 눈길인 양 쌍꺼풀만 깜짝이는 거다
돌아앉아 앵두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나직이 우는 거다
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문태준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앵두의 혀
안도현
앵두를 먹었지
그러니까 작년 여름
툇마루 끝에 앉아 먹었지
한 알 한 알이 예뻐서
한 알 한 알을 낱낱이 들여다보며
거 왜 있잖아, 시기도 하고 달기도 한 연애 같은 앵두를
흰 쟁반 가득 따다가 놓고서는
손가락으로 한 알 한 알 골라 먹었지
앵두 즙이 잇몸 속까지 적셔서 처음에는 찔끔 진저리치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언제 이 앵두를 다 먹나 싶어서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듯이도 먹었지
아무리 입에 우겨 넣어도 볼이 불룩해지지 않는 것은
앵두 알을 씹는 사이, 그 어느 틈에
씨앗을 발라 뱉는 기막힌 혀가 있기 때문
거 왜 있잖아, 앵두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을 때,
앵두 알을 깨물어 입안에서 환하게 토도독 터져서는 물기 번질 때,
하루 내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
장차 내 인생이나 네 인생에 쉽사리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
앵두를 먹을 때,
툇마루 끝에 앉아
앵두를 먹었지
앵두 씨를 툿,툿,툿, 뱉어가며 먹었지
그런데 있잖아, 앵두 씨에도 혀가 있다는 말 들어봤나?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혀끝으로 발라 우리가 마당에다 내뱉은 만큼
앵두 씨가 자기를 밀어 올리는 것 봤나?
지금 앵두의 혀가
날름날름 연초록 바람을 골라 먹고 있다니까!
앵두가 뒹굴면
김영남
잎 뒤 숨어있는 사연들
일러바칠 곳 없는 동네
우물 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
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
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날이여!
앵두꽃 피고 지는 사이
하종오
잎새가
나를 끌어다 놓고 한 생을 받들게 했다
내가 기뻐하니 꽃피었다
뿌리가
내게 닿아서 한 생을 파들어오게 했다
내가 아파하니 꽃 졌다
봄 짧은 한 때 앵두나무를 만난 뒤로 남은 생이 두려웠다 내 폐 위로 나무들이 지나가서는 산에 멎었
다. 산마루마다 차라리 내 폐를 벗어 걸어두고 들숨 쉬고 싶었을 때, 산은 내게서 달아났고, 나는 허공
에 남겨진 산 색에 젖어 내려 앉았다. 평지에는 내 육신을 덮어쓴 일년생 화초들의 생만 남아서 난분분,
난분분, 회비에 떨었다
앵두
최승호
어떻게 과거의 산들이
현재로 흘러들고
현재의 푸른 산봉우리들이 과거로 흘러가는가
모든 존재가 거품덩이며
비존재 또한 허구렁이라고
생각해 온
내
앞에
앵두나무는 서 있다
오늘은 유월 육일 현충일이다.
나는 슬픔 없이 빨간 앵두를 바라본다
당당한 햇살
적나라한 앵두
이 말랑말랑한 보석들로
앵두술을 담글 수도 있으리라
낮술에 취해
생각의 흐린 웅덩이들을
발효시킬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생각
이전에
빨갛게
익은 앵두를
빨갛게 볼 수도 있으리라
앵두나무
함 기 석
총성이 울렸다
날개를 다친 한 마리 물새가
내 손바닥에 날아와 쓰러졌다
나팔꽃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새를 묻었다
내 사랑을 묻고 무너진 가슴을 묻었다
하얗게 하얗게 눈이 내렸다
봄이 되자 구덩이에서
아름다운 앵두나무가 돋아나왔다
가지마다 빠알간 구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는 가장 덜 익은
가장 상처가 많은 구두를 신고
쓸쓸히 언덕을 내려왔다
빈 배가 한 척 공중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앵두나무 가지 사이로 샘물이 밀려왔다
그 맑고 투명한 물에
아픈 발을 씻고 눈을 씻고
홀로 생의 검은 총구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활짝 핀 앵두 꽃잎들이 푸드득 푸드득
새소릴 내며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앵두가 익을 무렵
김종태
마을회관 앞 앵두나무 다 익으면
떠났던 사람들 돌아올 것입니다
잎보다 먼저 오판화(五瓣花)가 피듯이
앵두는 한 순간에 다 익는 법 없습니다
설익은 것들이 푸른 잎사귀 위로 쫑긋할 때
농익어 주름진 것들은 황토 물들이며 사라집니다
앵두가 익을 무렵 앵두는 지고
지는 열매를 주우러 모여든 할머니들은
기웃한 삽짝 같은 기억을 앵두칠합니다
붉게 물든 혓바닥이 만든 광채에 이끌려
골목을 뛰어다니는 핵과(核果)같은 아이들도
앵두를 얻어먹으러 이 골목에 멈춥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누가 앵두의 시절을 믿을까요
앵두가 익을 무렵, 없는 나무에 손 뻗어
앵두를 흘리는 어린 소녀들을 보았습니다
초저녁 그믐 달빛 젖어 앵두장수 떠나가고
시간을 잃어버린 할머니들은 오랜만에
주인 없는 앵두 앞에서 홍조를 띱니다
연서(戀書)같은 꽃 기별 듣거들랑 누이처럼 오구려
앵두는 익어도 오지 않는 사람들 있어
벌레 먹은 꽃받침처럼 황혼에 역력합니다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양 한 마리가 무릎을 꿇은 채 여자의 잠속으로 절룩
절룩 걸어다닌다 도끼에 찍힌 자국들이 헐벗은 사타구니
처럼 드러나 있는 앵두나무 저 여자는 언제 죽을까 죽은
앵두나무 아래 죽을 줄 모르는 저 여자 미친 사내가 도끼
를 들고 다시 등뒤에 선다 미래의 상처가 여자의 두개골
속에서 시커멓게 벌어진다 앵두나무 죽은 앵두나무 말라
죽은 앵두나무 도랑을 가득 채우고 흐르는 것은 검은 머
리카락이다.
앵두꽃이 피면
곽재구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첫 입맞춤을 주랴
햇살도 곱디고운
조선 청보리 햇살 거두어다
바람도 실하디실한
남도 산머루 바람 거두어다
너의 속살 고운 치마폭에 널어놓고
돌산머리 애장터
아메리카나 소비에트나
팔푼 얼간패 좀 보라고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오천년 조선 머스마의
까치동 첫사랑을 주랴.
옛 노트에서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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