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저녁이 올 때
문 뒤로 숨고 싶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갓진 부엌에 혼자 서서 수제비를 끓인다지
가장 먼 하늘을 달려온 눈가루를 뭉쳐 반죽하고
말랑말랑 차진 달의 살점을 떼어내듯
숭숭 수제비를 뜯어 넣는 거야
어떤 건 귀가 찢어져 나가고 어떤 한 점은
까마귀 파먹은 해골박
못 먹을 시름도 뜨거운 양철냄비 안에서는
간간히 우려지지
벌레 묵은 푸성귀의 쌉싸래한 시간들을
싹둑싹둑 저며 넣은 수제비는
가난하고 쓸쓸하지 그래서 더 쫄깃하지
한 사내 등지고 강에서 물수제비 날리던 날
제일 먹고 싶었던 것도 웬일인지 엄마의 수제비
수제비는 무릇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지
그래 절정이라는 거 격정이라는 거
후후 불며 혀까지 데어 가며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코를 처박고 먹을 일이지
뜨거운 위로가 필요한 날은 그렇게
눈물 콧물 쏟아가며 국물을 들이켤 일이야
허기진 목숨 거두어 먹이는 일보다 더 징글징글한
일은 세상에 없는 법이라고
그보다 더 예의 바른 저녁도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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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2000 『실천문학』으로 등단
* 미네르바 2009년 여름호(신진조명 중에서), 연인M&B
작곡과 연주ㅡ김은경의 시
김은경의 시는 뛰어난 음악 같다. 그는 말을 부릴 줄 아는 시인이다. 굳이 시력詩歷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시인으로서의 수련 기간이 길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능수능란함이 시에 배어있다. 그런 숙련됨은 윤기가 되어 시에 사용된 어휘, 의성어 의태어 외에도, 자연스러운 어투와 어법이 어른어른 거린다.
수상한 저녁이 올 때
문 뒤로 숨고 싶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갓진 부엌에 혼자 서서 수제비를 끓인다지
가장 먼 하늘을 달려온 눈가루를 뭉쳐 반죽하고
말랑말랑 차진 달의 살점을 떼어내듯
숭숭 수제비를 뜯어 넣는 거야
어떤 건 귀가 찢어져 나가고 어떤 한 점은
까마귀 파먹은 해골박
못 먹을 시름도 뜨거운 양철냄비 안에서는
간간히 우려지지
벌레 묵은 푸성귀의 쌉싸래한 시간들을
싹둑싹둑 저며 넣은 수제비는
가난하고 쓸쓸하지 그래서 더 쫄깃하지
ㅡ「수제비를 끓이는 저녁」부분
인용된 시에는 수상한 저녁, 숨고 싶은 사람들, 수제비, 숭숭 수제비의 '수'의 반복과 변주, 쌉싸래한 시간들, 싹둑싹둑 시간들, 싹둑싹둑, 쓸쓸의 '싸(ㅆ)"의 반복, 떼어내듯, 뜯어 넣는, 한갓진, 차진 등으로 반복되고 변주되는 유사음들이 시에 음악성과 리듬을 살리고 있다. 어투 역시 '끓인다지, 넣는 거야, 우려지지, 쓸쓸하지, 쫄깃하지' 등으로 이어지며 자연스러운 독백체를 구사한다.
이 시의 자연스러움은 언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논리와 비약, 전개와 단절이 매우 적절하고 안전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구현된다. 수제비를 끓이는 저녁ㅡ가장 먼 하늘을 달려온 눈가루 반죽ㅡ달의 살점을 떼어내듯 뜯어냄ㅡ얼굴ㅡ찢겨진 귀와 까마귀가 파먹은 해골박ㅡ못 먹을 시름ㅡ우려지는 국물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전개를 따라가는 일은 마치 잘 설계된 계단이나 징검다리를 걷는 것처럼 편안하게 경험된다. 그러나 이런 능수능란한 요리는 시를 마무리 할 때 어떻게든 결론내려야 한다는 시인의 의지(?) 때문에, 혹은 음악성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클리셰라는 고명이 뿌려지는 것 같다. 「수제비를 끓이는 저녁」이 보여준 사랑시의 유려함이 뒷부분에서 '허기진 목숨을 거두어 먹이는 일보다 더 징글징글한 일은 세상에 없는 법'이라면서 결론을 내리면서 익숙하고 평범하게 멈춰버린 것은 서운한 일이다.
「어떤 이유」는 대중가요(임재범의 '너를 위해'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를 패러디하여 가져오고, 허수경 풍의 ('꺌꺌, 당신이라는 외계의 구멍'이라는 도발적인 시구는 즉시 허수경의 '큭큭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를 떠올리게 한다) 시구를 도발적이고 노골적으로 변주하여 삶(사람)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 주는 지독한 외로움을 구현하고 있다.
이 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복은 「수제비를 끓이는 저녁」과 달리 음악성에 생기가 돌지 않는다 이는 어떤 번복이나 변주가 없이 이어지는 반복과 글자수의 자수율을 맞추는 데에 음악성의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지루해진 탓이다. 그러나 이는 시인의 실수라기보다는 시인은 이 시가 추구하고 있는 '지루하고 견고한 외로운 일상의 끝없음'이라는 주제를 형식적으로 구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시인이 구현해낸 지루하고 견고한 외로운 일상은 시의 끝부분에 놓인 도발적인 시구로 인해 외려 충격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 아쉬운 부분은 '오늘도 결핍이 나를 밀어간다'와 같은 요약과 정리이다. 시인은 뛰어난 작곡가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객석에 앉아서 박수만을 치는 존재가 아니다. 독자는 무대에 올라 음악을 연주하는 존재로 승격된 지 오래다. 시는 시인이 쓰기를 마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완성되는 것이다. 시인이 시의 결론을 요약 정리해서 알려줌으로써 연주까지 마칠 필요는 없다.
ㅡ이수정(시인), 평론 - [눈,고독이 주는 축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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