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공포라는 화석 [나희덕]

초록여신 2009. 5. 28. 00:58

 

 

 

 

 

 

 

 

 

 

 

그는 어떤 붕괴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포는 늙지 않는다는 듯

이 흉터 좀 봐, 하며 팔목을 걷어 보여준다

무너진 백화점 철골 사이에서

그가 실려나온 것은 벌써 십년 전 일이다

그러나 그의 몸엔 공포가 화석처럼 남아 있는지

어깨를 만지면서 얼굴을 찡그린다

피 대신 침을 튀기며 그는

콘크리트 더미에 삼일이나 눌려 있던

통증을 필사적으로 불러낸다

망각의 벽을 뚫고

녹슨 철골이 드러나고

철골과 콘크리트 더미에 비가 내리고

빗물을 받아먹으며 견디던 목숨들이 실려나온다

벽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던 대화에 대해

그러다 문득 끊어진 목소리에 대해

자신의 어깨를 들어올려주던 손의 질감에 대해

실려나오는 순간 처음 본 빛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입 속에는

오래 되새김질된 공포가 흥건하게 고여 있다

그것만이 공포를 잊는 길이라는 듯

 

 

 

 

* 야생사과, 창비(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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