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노루 [나희덕]

초록여신 2009. 5. 28. 00:53

 

 

 

 

 

 

 

 

 

마음이 궁벽한 곳으로 나를 내몰아

산속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달리다보면 손은 수시로 뿔로 변하고

발굽 아래 무엇이 깨져나가는지도 모른 채

밤길을 달리다 문득 멈추어선 것은

그 눈동자 앞이었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의 눈빛,

길을 잃어버리기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에 놀라 주춤거리다가

도로 위에 쓰러진 노루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저 어리디어린 노루는

산속에 두고 온 스무살의 나인지도,

말없이 사라진 사람인지도,

언젠가 낳아 함부로 버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발굽으로

불행의 속도를 추월할 수는 없다 해도

어서 일어나 남은 길을 건너라

저 울창한 달래와 마루 덩굴 속으로 사라져라

누구도 너를 찾아낼 수 없도록

 

 

 

 

* 야생사과, 창비(200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