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깻대를 베는 시간 [고영민]

초록여신 2009. 4. 30. 23:23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 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 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 간 것들을 옮겨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 공손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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