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연필 깎기 [도종환]

초록여신 2009. 3. 31. 12:08

 

 

 

 

 

 

 

 

 

 

 연필을 깎는다 고요 속에서 사각사각 아침시간이 깎여나간다 미미한 향나무 냄새 이 냄새로 시의 첫 줄을 쓰고자 했다 삼십 년을 연필로 시를 썼다 그러나 지나온 내 생에 향나무 냄새 나는 날 많지 않았다 아침에 한 다짐을 오후까지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문을 나설 때 단정하게 가다듬은 지조의 옷도 돌아올 땐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연필을 깎는다 끝이 닿아 뭉툭해진 신념의 심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깎는다 지키지 못할 말들을 많이 했다 중언부언한 슬픔 실제보다 더 포장된 외로움 엄살이 많았다

 

 

 연필을 깎는다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걸 안다 내가 내 삶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내 마음을 믿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람이 그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모순어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시각 얇게 깎여져나간 시선의 껍질들을 바라보며 연필을 깎는다

 

 

 기도가 되지 않는 날은 연필을 깎는다 가지런한 몇 개의 연필 앞에서 아주 고요해진 한 순간을 만나고자 연필 깎는 소리 만이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제 뼈를 깎는 소리와 같이 있고자

 

 

 

 

* 해인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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