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에 산짐승 다녀간 발자국밖에 없는데
누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문 앞에서 산길 있는 데까지
길을 내며 눈을 쓸었다
이제 다시는 당산나무를 넘어오는 발소리를
기다리지 말자 해놓고도 못다 버린 게 있는 걸까
순간 순간 한 방울씩 녹아내린 내 마음도 흘러 고이면
저 고드름 같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
종유석 같은 고드름이 댓돌 위에 떨어져 부서진다
기다리는 것 오지 않을 줄 늦가을 무렵부터 알았다
기다림이란 머리 위에 뜨는 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내게 보내는 화살기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길이 눈에 덮여 지워지고
오직 내 발자국만이 길의 흔적인 눈 속에서
이제 발소리를 향해 열려 있던 귀를 닫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날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천천히 지워진 다음날 새벽
아니 그 새벽도 잊어진 먼 뒷날
창호지를 두드리는 새벽바람 소리처럼 온다 해도
내 기다림이 완성되는 날이 그날쯤이라 해도
나는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접은 것은 어쩌면 애타는 마음이나
조바심인지 모르겠으나
생애보다 더 긴 기다림도 있는 것이다
기다림을 생애보다 더 길게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가야 하는 생도 있는 것이다
* 해인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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