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노새 [박철]

초록여신 2009. 3. 16. 06:08

 

 

 

 

 

 

 

 

 

 

 

 

나는 가끔 햇볕이 쨍쨍한 어느 겨울날

노새를 끌고 내 고향 곤당골 눈이 부신 언덕을 넘는 그림에 빠진다

삼한사온의 끝 무렵 날씨는 포근하여

솜이불처럼 세상이 따뜻하게 묻어오는 날

이유없이 시글시글 웃음을 흘리며

칡넝쿨 흩어진 언덕을 넘어가는

철 이른 아이

나는 전생에 맘씨 좋은 주인의 종이었나보다

머슴이었나 눈을 감으면 먼 곳 심부름이라도 잘 마치고 돌아오는 듯

노새를 붙들고 가볍게 언덕을 넘으며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눈이 소곤소곤 나리는 오늘 나는 홀로 정발산을 넘으며

산 아래 펼쳐진 신도시의 장관이 너무 뜨끈하여

삼한사온의 따뜻함도 놓칠 뻔했다

나는 누구의 부름도 받지 못하고 그냥 산을 넘는 중

굳이 내가 아직도 머슴이라면 주인은 사거리에 걸린 그리움 정도

전생이나 이생이나 나는 햇살 따뜻한 날 무사히

눈매 서글한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언덕을 내려와 나의 마을로 사라진다

 

 

 

 

 

* 불을 지펴야겠다, 문학동네(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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