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햇볕이 쨍쨍한 어느 겨울날
노새를 끌고 내 고향 곤당골 눈이 부신 언덕을 넘는 그림에 빠진다
삼한사온의 끝 무렵 날씨는 포근하여
솜이불처럼 세상이 따뜻하게 묻어오는 날
이유없이 시글시글 웃음을 흘리며
칡넝쿨 흩어진 언덕을 넘어가는
철 이른 아이
나는 전생에 맘씨 좋은 주인의 종이었나보다
머슴이었나 눈을 감으면 먼 곳 심부름이라도 잘 마치고 돌아오는 듯
노새를 붙들고 가볍게 언덕을 넘으며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눈이 소곤소곤 나리는 오늘 나는 홀로 정발산을 넘으며
산 아래 펼쳐진 신도시의 장관이 너무 뜨끈하여
삼한사온의 따뜻함도 놓칠 뻔했다
나는 누구의 부름도 받지 못하고 그냥 산을 넘는 중
굳이 내가 아직도 머슴이라면 주인은 사거리에 걸린 그리움 정도
전생이나 이생이나 나는 햇살 따뜻한 날 무사히
눈매 서글한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언덕을 내려와 나의 마을로 사라진다
* 불을 지펴야겠다, 문학동네(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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