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폐허에 관하여 [유하]

초록여신 2009. 1. 17. 05:53

 

 

 

 

 

 

 

 

 

유채 꽃밭 너머 스러져 가는 빈집이 있다

할머니는 주인 잃은 강아지를 키우며

폐허의 마지막 숨길처럼 그곳을 지난다

처마를 영영 떠나 빈집과 내외하는 참새들

미련 많은 제비들도 더 이상 그곳에 집을 짓지 않고

이젠 오래 묵은 손때마저 집착을 버리고

썩은 지붕 위로 달아난다 고래고래

어둠의 플랑크톤을 다 잡아먹던 술고래 주인

아낙네의 밥그릇 깨지는 절규, 깨복장구 아이의 울음소리

한때 집안 가득 붐비던 고통의 손아귀도

한없이 가벼워 가는 빈집의 영혼을 어쩌진 못하리라

그리움 하나로 폐허를 견디는 것은 나의 일일 뿐

두 눈을 지우고 그저 무심으로 서 있는 빈집

봄날 햇살 저 혼자 칭얼대다가 이내

멋쩍은 듯 머릴 긁적이며 그곳을 떠나 버린다

비록 악취일지라도 어쩌면 사람의 온갖 뒤척거림이

집 안에 마음의 눈동자를 달아 주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빈집은 아무 걱정 없이

공기처럼 가볍게 사라져 갈 것이다

멸망을 찬양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사람들 몫이므로

 

 

 

 

*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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