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마종기]

초록여신 2008. 12. 13. 19:33

 

 

 

 

 

 

 

 

 

경상도 하회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을 안주 삼아 한잔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 뜨고 해 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 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물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

* 신약, 「로마서」8: 24.

 

 

 

 

* 2009 제54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수상시인 자전작 중에서.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溫柔에 대하여 [마종기]  (0) 2008.12.13
길 [마종기]  (0) 2008.12.13
섬 [마종기]  (0) 2008.12.13
밤 노래 4 [마종기]  (0) 2008.12.13
두 개의 일상 [마종기]  (0) 2008.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