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골고루 가며오며 또 한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득 뿌려주었는데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2004)
.......
바야흐로 김장철이죠.
왕소금으로 배추를 절였는데도 어느새 파릇파릇 살아나 밭으로 가는 배추들을 목격한 경우가 있지요.
얼마나 살고 싶으면, 얼마나 성깔이 있으면 그랬을까나 미안해지는 일인데
그때는 그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채 왕소금만 자꾸만 뿌려댔지요.
소금에 절여진 몸, 얼마나 아팠을까요?
배추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김장김치를 맛있게 먹어주는 게 아닐까 싶네요.
맛있는 김장김치 담그시고요
담그신 분들의 정성과 사랑, 배추의 희생정신을 기르며 한입 베어물고 1초간이라도 묵념하시길...
(배추의 상처를 오늘도 맛나게 냠냠하면서,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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