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그리움이 없었다니.
가루처럼 갈려 나간 토막들 하나하나가 다 그리움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강으로 쓸려 내려오는 건 그리움의 잔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가 믿었던 그날그날의 신(神)들이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온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다 믿었냐고요. 그날은 믿었지만 오늘은 그리움조차 없습니다. 오늘 나는 눈물에 쓸려 가 버렸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쾌나 길었습니다. 그날그날의 그리움에게 바쳤던 눈물이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오늘 나는 눈물에 쓸겨 갑니다. 언젠가 신이 사라진 날 내게는 눈물이 사라졌고, 신이 돌아온 날 나는 온통 눈물입니다. 가득 찬 게 없어 흘릴 눈물도 없었는데 오늘 나는 눈물에 쓸려 갑니다.
내가 악마였던 날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악마인 나를 떠올리며 쓸려 가 버린 토막들을 기억합니다. 내게 신이었던 날들을 기억합니다. 왜 여름날의 눈물은 흙탕물뿐인지, 왜 감당이 되지 않는지.
가난한 사람이 음식 앞에서 수줍어하는 것처럼 나는 오늘 눈물 앞에서 수줍어합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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