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청快晴
며칠째 철 늦은 장마였다
밤새도록 퍼부어대는 그 장대비 맞아가며
제발, 제발, 허락해달라고
일생을 우레 앞세운 간청 끝내 외면한 채
불 꺼진 방안에서
고스란히 폭우를 받아내던 아비,
자식보다 더 아프게 무릎 꿇은
뼈저린 밤이 있었을 것이다
구름 한 점 없어서
이 터무니없는 공허여, 푸른 침묵으로
파놓은 수렁길이
낙타나 따라 걷는 사막 속은 아닐 터인데
근심 한낱 안 흘리고
저렇듯 빈 마음으로나 가닿을 아득한 깊이라면
어딘들 무슨 허락으로 먹구름 이끌리랴!
무성한 여름을 몰아간 게 잠시 전의 비바람이라 해도!
천지간
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놓는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켜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여름밤은 너무 짧아 수평선 채 잠그지 못해
두 사내가 빠져나와 한밤의 모래톱에 마주 앉았다
이봐,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려놓으면 바다가 다 메워질 거야
그럴 테지, 사방을 빼곡히 채운 이 어둠 좀 봐
막막해서 도무지 끝 간 데를 몰라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겹쳐
밤새도록 철썩거리며 파도가 오고
그래서 망연茫然한 여름밤은 더욱 짧다
어느새 아침 해가 솟아
두 사람을 해안선 이쪽저쪽으로 갈라놓는다
그 경계인 듯 파도가
다시 하루를 구기며 허옇게 부서진다
대추나무와 사귀다
어떤 벌레가 어머니의 회로를 갉아먹었는지
깜박깜박 기억이 헛발을 디딜 때가 잦다
어머니는 지금 망각이라는 골목에 접어드신 것이니
번지수를 이어놓아도
엉뚱한 곳에서 살다 오신 듯 한생이 뒤죽박죽이다
생사의 길 예 있어도 분간할 수 없으니
문득 �은 꿈에서 깨어난 오늘밤
내 잠도 더는 깊어지지 않겠다
이리저리 뒤척거릴수록 의식만 또렷해져
나밖에 없는 방안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고
누군가 건너방의 문을 여닫는다, 환청인가?
그러고 보면 나 어느새 부재와도 사귈 나이,
......그날 아무리 밀어도 밀려나지 않던 윈도우의 안개
셋이 동승한 차 안에서 한 여자의 흐느낌 섞인 노래 들었으니
도가네 식당
길가에 주저앉은 허름한 식당을 보면
여기가 거긴가 고개부터 갸우뚱거릴 테지만
나는 이 집의 오랜 단골, 몇 년 전까지
그렁그렁한 처녀와 늙은 할머니가
넘치게 탕을 끓여 내왔었다, 새뱅이* 한 냄비 시켜놓고
저물도록 뒷방에서 고스톱 쳐도
손님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미안하지 않았었지
이슥한 시간에 일어서면 지척을 가린 안개가
저수지 갓길을 메워버려 수초를 더듬곤 했었다
식당은 인터넷에까지 입들을 모아놓아
점심 때 가보면 건넌방 뒷방 달아낸 방 할 것 없이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려야 하지만
그건 탕 맛 때문만도 아니리, 할머니 대신
젊은 손자 부부가 끓여내는 매운탕 속 메기가
어디선가 대량으로 양식되어 공급되는 것처럼
한때 지천이었다는 이 저수지의 붕어 가물치도 오래전에
씨가 말랐으니 새 맛은 옛 맛을 덮으며 올 뿐!
아직도 긴 수염을 매단 어느 게으른 메기가 저수지
한구석에 배를 깔고 엎드렸을지라도
배스라든가 낯선 외래종이 점령한
이 저수지의 황금시간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매운탕 한 냄비 해치우고 밖으로 나서니
초저녁인데 제 물인 듯 첨벙 뛰어오르는 배스 한 마리
저수지 주인이 바뀐 것을 내게 확인이라도 시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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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뱅이 : 민물새우의 속어
독창毒瘡
치명致命에 들려서라도 돌파하고 싶었던
연애가 있었다 하자, 그 찌꺼기까지
기꺼이 받아 마실 어떤 비굴함도
뱃바닥으로 끌고 가면서
할 수 있다면 나 독배毒杯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
아편에 저린 듯 자욱한 몽롱을 헤쳐 나왔지만
문제는 난파한 뒤에도 오랫동안 거기 계류되어 있었다는 것
이명처럼 흔들어서 나를 깨운 것은
누구의 부름도 아니었다
한 구덩이에 엉켜들었던 뱀들
봄이 오자 서로를 풀고 구덩이를 벗어났지만
그 혈거 깊디깊게 세월을 포박했으니
이 독창은 내가 내 몸을 후벼파서 만든 암거暗渠!
서로에게 흘려보낸 저의 독으로
마침내 지우지 못할 흉터를 새겼으니
허물 벗은 뱀은 제 허물이더라도
벗은 허물 다시 껴입을 수 없는 것을!
* 2008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종후보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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