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김근]

초록여신 2008. 10. 3. 23:36

 

 

 

 

 

 

 

 

 

 

 이제 우리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구름떼처럼은 아니지만 제 얼굴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 하나둘 숨어드는 곳 햇빛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아요 날카롭게 돋아나서 눈을 찔러버리는 것들은 잊고 구름으로 된 의자에 앉아 남모르게 우리는 제 몫의 구름을 조금씩 교환하기만 하면 되지요 「구름목장의 결투」나 「황야의 구름」같은 오래된 영화의 총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는 없어요 구름극장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네모난 영사막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금세 다른 모양으로 몸을 바꾸지요 그럴 때 사람들이 조금씩 흘려놓은 구름 냄새에 취해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건 어때요 오직 이곳에서만 그대와 나인 우리 아직 어둠속으로 흩어져버리기 전인 우리 서로 나눠가진 구름의 입자들만 땀구멍이나 주름 사이에 스멀거리기만 할 우리 아무것도 아닐 그대 혹은 나 지금은 너무 많은 우리 사람들이 쏟아놓은 구름 위를 통통통 튀어다녀보아요 가볍게 천사는 되지 못해도 얼굴이 뭉개진 천사처럼 하얗고 가볍게 이따금 의자를 딸깍거리며 구름처럼 증발해버리는 사람이 있어도 그런 건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요 구름극장이 아니어도 우리도 모두 그처럼 가볍게 증발해버릴 운명들이니까요 햇빛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아요 구름에 관한 동시상영 영화들은 그리 길지 않아요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저녁이면 둥실 떠올라 세상에는 아주 없는 것 같은 구름극장 말이에요

 

 

 

 

*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 창비, 2008.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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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근

 

197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이월」등 5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불편'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구름극장에서 만나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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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유명한 것이 '안개'인 그런 도시에 와서 김근의 시를 읽는다. 그의 시는 "집 안에 물이 차올"라 세간을 적시듯, 모든 풍경과 감각이 "축축하"거나 "미끌미끌"하거나 "번들거리"거나 "미끄덩"거린다. 이 유기적인 움직임은 마침내 "흔들리고 흔들린다" 척박한 땅을 훌쩍 뛰어넘어 가볍게 통통통 구름 위를 뛰어다닌다. 누가 누군가를 마중 나가듯 "너 오는가"하며 그의 시를 읊조릴 때쯤이면 "날카롭게 돋아나서 눈을 찔러버리는 것들"을 잠시 잊고 그 "구름극장"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어진다. 구름극장. 여기는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 "꽃도 피지 않고 죽은 나무나 무성한 무서운 경계" 같은 건 눈물처럼 흘러내린 세계. 우리는 고독하지도 허무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기 전에 거기 가고 싶다, 구름극장. 그것이 이 세상에 진짜로 없는 장소라고 해도. 지금은 다만 "모든 안은 다시 바깥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으니까.

ㅡ 조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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