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국화는 진하다 [이병률]

초록여신 2008. 10. 3. 11:07

 

 

 

 

 

 

 

 

 

 

 

국화 화분 네 개를 삽니다

당신이 산 열한 개의 국화 화분에는

일곱 개 못 미치는 셈입니다

일곱 개를 다 맞추지 못하는 마음에

비린 햇발이 내려앉습니다

열한 개의 화분에 일일이 꼬리표를 달아

누가 가장 오래 살아남을지 내기하자며

하얀 이 드러내 보이던 당신

열한 개의 국화 화분을 들여놓은 방에서

옷을 다 벗고 죽었다고

멀리 있던 내게 소식 왔을 때는

삼 년 지나 마음 어둑해져 아무도 만나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런 줄 모르고 왜 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가을이면 지천으로 국화만 보내느냐고 물었습니다

버리려고 내놓았던 빈 화분 안으로 머리를 넣습니다

옛것이 생각나 쏟아지겠습니다

행여 짤막한 몇 줄까지 죄다 쏟아놓더라도

인연의 나중은 무겁습니다

 

 

 

 

*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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