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어쩌면 느리지 않게 안개가 내리고 있습니다. 나도 더디게, 어쩌면 더디지 않게, 아래로 내려섭니다. 계단을 밟듯 차근차근 내려가고 또 내립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안개가 제격입니다.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탈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탈 속에서 울고, 탈 속에서 웃고...... 불행하게도 진짜 꽃들은 시들어, 가짜 꽃들만 만발합니다.
가짜 꽃들이 되레 진짜로 보이는 이곳은 아무래도 미궁입니다. 지독한 안개마을입니다. 울음 너머 웃음이, 웃음 그 안켠에는 울음이 짝지어 히히덕거립니다. 세상은 물구나무서서
우는 사람들을 스치며 미소를 머금은 사람들을, 웃는 사람 등뒤에서 울먹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는가 봅니다. 눈 가리고 아웅, 돌고 또 도는 모양입니다.
안개가 물러서기를 기다립니다. 더디게, 어쩌면 더디지 않게, 마음만 앞세워 계단을 오릅니다.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지만, 밤 이슥토록 생각에 바퀴를 달아 굴립니다.
안개가 물러서고, 불현듯 비수처럼 번뜩이는 생각의 저 끄트머리에 미궁도, 안개 마을도 둥글게 뒤척이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느릿느릿, 어쩌면 느리지 않게, 새 아침이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아래로 낮게 내려가며 멀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 안동 시편 / 문학과지성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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