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면서 깊어진다. 물은, 지나온 길 지우며
푸르고 맑아진다. 마음 끼얹어도,
물길 따라 내려가보아도, 나는 푸르게
깊어지지 않는다. 맑아지지 않는다.
흘러흘러 여기까지 왔지만, 더듬어가는 길,
하늘마저 무겁게 흔들린다. 길은 안 보이고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
해가 기운다. 별이 뜨고 달이 간다.
물위에 써보는 내 이름, 물아래 지은
내 마음의 집, 모든 방들이 흔들린다.
어두워지다 지워진다. 하지만 물은 흐르면서
더욱 깊어진다. 모든 길들을 지우며
푸르고 맑아진다. 나는 서럽도록 들여다본다.
물아래 다시 집을 짓고, 그 안쪽 방에 창을 낸다.
풋풋하게 눈뜨는 말들을 기다린다.
별빛 흩어지는 물아래 풍경 소리 아득하고
불현듯 탑 하나 솟는다. 내 마음도, 발바닥도
하늘의 옷빛 속에 들어 젖은 꿈을 꾼다.
* 내 마음의 풍란 /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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