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물, 또는 젖은 꿈 [이태수]

초록여신 2008. 7. 22. 14:38

 

 

 

 

 

 

 

 

 

 

흐르면서 깊어진다. 물은, 지나온 길 지우며

푸르고 맑아진다. 마음 끼얹어도,

물길 따라 내려가보아도, 나는 푸르게

깊어지지 않는다. 맑아지지 않는다.

 

 

흘러흘러 여기까지 왔지만, 더듬어가는 길,

하늘마저 무겁게 흔들린다. 길은 안 보이고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

해가 기운다. 별이 뜨고 달이 간다.

물위에 써보는 내 이름, 물아래 지은

내 마음의 집, 모든 방들이 흔들린다.

어두워지다 지워진다. 하지만 물은 흐르면서

더욱 깊어진다. 모든 길들을 지우며

푸르고 맑아진다. 나는 서럽도록 들여다본다.

물아래 다시 집을 짓고, 그 안쪽 방에 창을 낸다.

 

 

풋풋하게 눈뜨는 말들을 기다린다.

별빛 흩어지는 물아래 풍경 소리 아득하고

불현듯 탑 하나 솟는다. 내 마음도, 발바닥도

하늘의 옷빛 속에 들어 젖은 꿈을 꾼다.

 

 

 

 

* 내 마음의 풍란 / 문학과지성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