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불한당들의 모험 12 [곽은영]

초록여신 2008. 6. 26. 18:57

불한당들의 모험 12

ㅡ 시곗바늘처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1

 모험담, 그런 것을 말해주길 기대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변한 나의 얼굴이 낯선 조카를 앞에 앉혀두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드라마를 가지고 있어 자기만의 책을 펼치면 천일을 읽기에 충분한 이야기들

 어린 조카야 너의 말을 듣고 싶다 왜 매번 슬픈 사랑을 하나요

 나는 침묵했다

 얼굴이 금방 빨개지는 조카는 동생의 손을 잡고 바이바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아이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이제 너도 누군가의 손을 잡겠구나 나는 너의 이야기를 기다리겠다

 

 

2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트렁크를 열었다

 초록색 잎과 갈색 깃털과 물큰한 과일향 새콤한 바다 영원히 내리는 눈을 한 주먹씩 쥐었다 놓았지

 무수한 당신들과 나 사이의 그림자를 쥐었다 놓았지

 그때마다 당신들 앞에 태엽을 감아야 하는 시계를 놓아주었다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트렁크를 닫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햇빛 속에 사는 당신을 안다는 것

 당신이라는 말ㅡ철컹, 거대한 시계가 멈추어 서는 소리

 

 

3

 눈 한 번 깜빡

 

 

 구름은 태양의 화살에 찔린 채 낙엽은 바람의 안부를 전하다가

 담장의 고양이가 점프하다가 아줌마가 고양이에게 물을 뿌리다가

 꼬리를 밟힌 개가 컹 이빨을 드러낸 채

 그대로 그대로 멈추었지 망고의 과즙과 소다수 거품이 터지다 만 채

 그리고 모습을 보여준 운명이라는 거대한 바퀴

 허공에 송글송글 떠 있는 모래알을 쓸어내리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바큇살마다 펼쳐진 열두 개의 계절과 열두 개의 별자리

 아름다운 지도구나

 손잡이가 그새 반질질질해졌구나

 세상에 익숙한 말로 너희들의 이름은  불행과 어리석음이지

 바큇살마다 나의 항로를 새겨놓은 운명이라는 바퀴

 세상에 익숙한 말로 알 수 없음이지

 그리고 나의 나침반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눈 한 번 깜빡

 

 

4

 당신을 본 순간, 그날 당신이 너무 늦게 왔거나 너무 일찍 왔기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나의 시계는 그만 뱃속 태엽을 토하고 죽어버렸다

 혀가 얼얼했다

 

 

5

 덕분에 침묵과 진실이 입 안에 고였다 당신의 이름을 혀 밑에 열두 달 감추어온 것처럼

 덕분에 태양과 달의 궤도를 외웠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연인들의 타원 궤도 같은

 

 

6

 열두 개의 계절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오르락내리락

 나름대로 아팠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또 똑같은 길을 가고 말 것인데

 그러나 씩씩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태양을 향해 인사하며 트렁크를 들었다

 

 

 운명의 항해키를 돌려 거침없이 험한 항로를 택한 것도 나의 손

 매번 슬프기만 한 항로를 택한 것도 나의 손

 다들 말리지만 이해받기 위해 길을 떠나지 않았다

 나침반을 보며 찡긋, 윙크,

 

 

 

 

 

* 검은 고양이 흰 개 / 랜덤하우스, 2008.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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