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꽃잎이 피고 질 때면 [김혜순]

초록여신 2008. 4. 27. 12:17

 

 

 

 

 

 

 

 

 

 

 

 꽃잎 돋으면 어쩌나. 가려워 어쩌나. 봄이 왔다고 산천초목 초록 입술 쫑긋 내미는데 이제 어쩌나. 당신들의 들러붙은 무릎 사이, 당신들의 맞붙은 입술 사이, 세상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 비집고 이파리 돋아나는데 어쩌나, 나 엎드려 기어가서 이 초록 벌판 다 짓이겨버리려네. 이 환한 초록 바다, 깊은 구멍 다 메꿔버리려네. 초록 속에는 시신들이 내뱉는 추깃물, 쓰디쓴 파랑, 검은 떫음, 붉은 비린내, 입술 화한 노랑, 다 들었으니 나 이 깊은 구만리장천 연초록 구멍들 다 씹어 삼키려네. 이것들 뭉개서 온몸에 칠갑 하려네. 내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개 밥그릇에 밥 던져주던 사람들 앞에서, 내 입으로 내 구멍으로 이 풀밭 이 산천 이 넓은 초록 바다 다 짓이겨버리려네. 온몸에 깜깜한 눈 번쩍 뜨려네. 꽃이 피면 어쩌나.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가려워 어쩌나. 자장자장 그 꽃 재워줄 손길도 없는데,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데, 뜨거운 몸 뒤트는 이 연초록 벌판 어쩌나.

 

 

 기도하라하네 쉬지말고기도하라하네 눈물로간청하라하네 순종하라언제나순종하라그러네 이 세상 구멍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서를 빌지 않고는 이 세상 넘어갈 수 없다하네 무릎꿇으라하네 벌레처럼머리를조아리라하네 두손으로싹싹빌라하네 낮추고낮추라하네 무릎을꿇고오줌발을받으라하네 가슴을치며회개하라하네

 

 

 열두 마리 새끼 밴 개 한 마리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네발로 땅 짚고 배를 맨땅에 부비며 새싹들을 뭉개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봄인지 겨울인지 비척비척 가려워 아 가려워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래져서 한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하나 지나가네 뒤뚱뒤뚱 지나가네

 

 

 

 

 

* 당신의 첫 / 문학과지성사, 2008. 3. 28.

 

 

 

.......

아 가려워 가려워,

내 겨드랑이에도 초록 날개가 돋아나려나,

꽃잎이 피고 지고 그 자리를 슬쩍 도배하고 마는, 연초록 새순들.

곧 '연'이란 자연색은 비와 공기와 햇살을 먹어 '초록'이라는 짙은 다리를 건너게 될 것이며,

커다란 초록나무들의 나라를 지나 여름무렵, 초록나무숲에 도착할 것이다.

그 '초록'이 지나온 구멍과 상처와 흠과 빈틈에 그 초록의 씨앗을 툭, 떨어뜨려 놓았으리라.

세상의 허물을 덮어주고, 다정했던 인들과의 오해와 잘잘못을 녹여주고, 식물과 동물과 인간에겐 생명의 잉태를...

그런 초록이 주는 선물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초록여신)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한 편의 즐거움  (0) 2008.04.28
신중한 삼각형 [바스코 포파]  (0) 2008.04.27
귀한 매혹 [양진건]  (0) 2008.04.27
어떤 필연 [양진건]  (0) 2008.04.25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차창룡]  (0) 2008.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