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첫눈을 밟고 [유종인]

초록여신 2011. 12. 10. 06:13

 

 

 

 

 

 

 

 

새벽에 도둑눈이 왔다

해마다 오건만, 이건 어찌하여 전대미문(前代未聞)인가

전날 고뿔에 마신 쌍화탕 기운처럼

설렘은 미지근해지고 두근거림은 먼발치로 물러나

눈에 덮인 디딤돌처럼 보이지 않는데

 

 

나는 새벽을 무시하고 아침을 건너뛰고 한낮을 뒤로 물린 차례였다

흐릿한 오후에, 그대가 오시던 때처럼

좀 어둑어둑한 새벽을

다시 허공 어디에선가 한 갈피 꺼내보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

 

 

뒤미처 설레듯 당기는 기척을

무끈히 가슴 한켠에 밀어 넣고

 

 

버선처럼 얇은 밑창의

굽이 없는 해진 여름 신발로

초겨울을 밟는다 밟아도 되는가

 

 

그럴 때, 발바닥은 맨손처럼 숫눈의 그늘을 더듬어

매양 다니던 마음 아닌 곳에 날 데려갈지도 몰라,

이건 이 풍진(風塵) 세상을 앞서 사사(師事)했다는 새삼스러움의

첫발들, 밑창이 버선발처럼 얇은

해진 여름 신발의 낙인(烙印), 그 초조한 반가움을!

 

 

설혹, 무슨 말들이 저 눈밭으로부터 소스라쳐 올라오더라도

그걸 신발보다 발바닥이 먼저 이해하는

맨발의, 맨발에 가까운

흰 혁명의 보폭을 보라

 

 

 

* 사랑이라는 재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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