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포위되어 자신을 겨누는 날
누군들 자신을 해치고 싶겠는가
그리운 먼 곳 저편 어디인지 몰라 아득할지라도
젖을 빨 때부터 눈엔 별이 반짝였던 것을
아파트에 서는 칠일장, 달걀이며 시금치며 두부를 파는
노인이 생각나는 겨울. 뺨을 보자기로 감싼 채
지나는 이를 애타게 올려보던 눈빛이며
다리를 저는 아들이며 골판지를 깔고 먹는 찬밥이며
누군들 누군들 따뜻한 뺨을 부비며
어미로부터 멀어지려 하겠는가
노인의 죽은 어미가 우는 밤
그 울음 끝에 노인 홀로 우는 밤
자신에게 포위되어 자신을 겨누다가
자신을 부둥켜안고 가위눌리는 비명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온 인생 몇 권 소설로 옮겨 적는 밤
* 시간의 동공, 문학과 지성사(2009)
고통은 삶을 삶답게 만들고 그 고통 속에서 나온 예술은 불멸의 이름으로 우리들 앞에 선다.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는 저녁 창가에 어른거린다. 시인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그것을 옮겨 적는다. 신록 우거진 잎사귀마다에 비가 내릴 때도 있고 눈이 불빛에 입회하기를 기다려 차를 달일 때도 있다. 그러나 불멸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책상에는 제문이 놓여 있고 문장의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빙긋이 불멸은 먼지로 가라앉을 뿐. 감각의 휴식, 욕구의 정지, 영원한 잠으로 미끄러지는 죽음에게도 불멸은 찾아오지 않는다.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더 고통 속에 있으라. 훌륭하게 죽을 수 있기 위해 훌륭하게 사는 법을 배우라. 살고 죽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전부로 전 생애의 명예가 된다.
불멸을 이기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처음 그것을 낳게 하는 필생의 노력이다. 시인이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시에 각일할 때 비록 시가 아프디아픈 살갗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지라도, 그러나 불멸의 힘에 의해 시는 고통 끝에 부활하는 불새처럼 날개를 활짝펴 산맥을 넘어간다. 시가 시다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만날 때, 인내를 시험하여 그 끝에 오는 평화를 퍼뜨리며 오는 시간과 만날 때 불멸은 시인의 눈을 통하여 세계의 곳곳을 일으켜 세운다. 아픔 없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으랴. 시를 쓸 때 아프지 않은 시인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불멸을 꿈꿀 때 쓰는 시야말로 날카롭게 벼리어져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꼿꼿하게 허공을 가른다.
ㅡ 시집 뒤 표지글, <시인의 산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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