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찬란 [이병률]

초록여신 2010. 3. 1. 12:55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찬란, 문학과 지성사(2010. 2.)

 

 이 무시무시한 '찬란'의 세계는 믿을 수 없다. 이 찬란을, 혹은 찬란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내면은 "무시무시한" 순진함에서 나온다. 삶의 지혜에 가까운 이런 언술은 거의 깨달음의 순간을 구술하는 승려의 새벽에 나오는 것인지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에 시달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이런 시를 쓰는 것일까. 찬란 앞에서 더없이 부신 눈을 감지 않고서는 어떤 길을 넘어갈 수 없으리라는 자기방어의 무의식 때문인가. 찬란 뒤에 도래할 환멸의 시간들에 대한 대비인가. 삶의 순간에 이런 이들을 놓쳐버린 자책인가.

ㅡ 허수경(시인), <작품해설-영혼의 두 극지 사이에 서 있는 사과나무>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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