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어두운 부분 외 4편 [김행숙] ㅡ 노작문학상 제9회 수상작

초록여신 2009. 12. 21. 09:56

어두운 부분

 

 내일 저녁 당신을 감동시킬 오페라 가수는 풍부한 감정과 성량을 가졌다. 예상할 수 없는 감정까지 당신에게.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이 사실일 때에도. 내일까지 바닥을 끌고 가는 긴 드레스 속에는 발목이 두 개, 곧 끊어질 듯. 젖도 크다, 곧 터질 듯.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은빛 칼처럼 빛이 쑥 올라오는 틈새가 있다.

 

 

1년 후에

 

지구가 돌아왔으므로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

그렇다면 좋겠어

나는 최초의 인간들이 떨면서 기다리던 봄처럼

 

1년 후에

또 시작하고 싶어

반복하고

그렇지만 네게 욕하지 않을 거야

식물을 기르고

분갈이를 해줄 거야

죽이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화분의 둘레를 알아?

네 질문은 언제나 난센스 퀴즈 같다

공원에 가자

산책로의 끝에서 내가 상상한 답을 들려줄게

같이 웃자

 

시장에 같이 가자

반복하고

반복해

1년 후에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지구를 또 비추는 햇빛은

또 찡그리는 너의 이마 위에도

 

그렇지만 나는 웃으며

꽁치 한 마리를 네 눈앞에서 시계추처럼 흔들지

그렇지만 너는

1년 후에는 외국에 공부하러 갈 거라고 말하지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

 

 빨강과 검정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에 대하여...... 너의 눈빛에 대하여...... 나의 마음에 대하여...... 어느 날 한 달 후에 알게 되는 것들. 나는 그럴 줄 몰랐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는 너처럼 너는 나처럼 거울의 혼동이 가득한 곳. 세상의 모든 미용실은 기이합니다. 14세기의 가위가 전승되는 곳에서 도구들은 발전의 발전을 하였습니다. 미용실에서 지구인이 외계인인 척하며 걸어 나오고 외계인이 지구인인 척하며 걸어 나와서...... 우리는 하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둘이다, 우리는 셋이다, 우리는 넷이다, 우리는 다섯이다,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침묵으로 돌아갔습니다. 각각의 침대에 누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 성기를 감추듯이 머리카락을 감춘 여인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를 밤새 읽었습니다. 아침이 밝자 소설의 문장처럼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못 읽었어요. 나는 못 읽었어요. 어쨌든! 나는 읽었어요.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내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목의 위치

 

 기이하지 않습니까. 머리의 위치 또한.

 

 목을 구부려 인사를 합니다. 목을 한껏 젖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인사를 한 후 곧장 밤하늘이나 천장을 향했다며, 그것은 목의 한 가지 동선을 보여 줄 뿐, 그리고 또 한 번 내 마음이 내 마음을 구슬려 목의 자취를 뒤쫓았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서 황급히 옷을 주워 입듯이.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면 목은 어느 방향을 피하여 또 한 번 멈춰야 할까요. 밤하늘은 난해하지 않습니까. 목의 형태 또한.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음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마침내 부러질 때까지 기쁨의 하얀 뼈를 조심조심 깎는 중일까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소용없어요, 목의 길이를 조절해 봤자. 외투 속으로 목을 없애 봤자. 그래도 춥고,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유령 간호사

 

 랄랄라 나는 너만 보호하네, 너는 천사의 그런 속삭임을 듣고 싶다.

 너는 지금 무척 아프고 헛것을 보고 있으니까. 헛소리를 하며 공중에 손을 휘휘 젓고 있으니까. 너는 계속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꿈속에서도 그렇군.

 오늘 새벽에 나는 네 꿈의 표면에서 땀을 닦아 주는 천사야. 그것은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야. 땀이나 눈물 같은 것으로 손수건을 흥건하게 적시는 그런 일들.

 그런 손수건을 쥐고 있으면 절대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너의 땀. 그리고 너의 눈물. 참 신기하게도 내 것과 똑같은 맛이 난다.

 얼음주머니를 너의 뜨거운 이마 위에 올려놓고 나는 소곤거린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는 네가 아주 가까운 데 있다는 걸 뜻한다.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들을 수 없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조심하고 싶다.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발걸음 같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너만 보호하네.

 나는 보일 듯 말 듯. 들릴 듯 말 듯. 나는 티를 내지 않는다.

 너는 축 늘어졌구나. 그것은 쉬기에 좋은 자세야. 다시는 서서 걸어 다니지 않을 것처럼. 다시는 노동을 구하지 않을 것처럼. 너는 달콤해진다. 설탕물이 끓듯이.

 왜 너의 쉬는 시간은 검은 사탕이 될 때까지 펄펄 끓어야 하는가. 나는 젖은 수건을 쥐고서 검은 사탕은 총알을 닮았군,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를 생각하면 항상 이상해진다.

 그래도 나는 날개를 접고 생각한다. 이크, 이렇게 오래 머물다간 날개가 쓸모없어져 버리겠군.

 

 

 

 

 

* 제9회 노작문학상(홍사용) 수상작품집, 동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