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핀 호수를 건너 태백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들, 날아가 아픈 이마 위에 놓여질 착한 물수건 같은 시간들, 그 이마 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를 미열들, 그 미열들을 끌어안고 안개꽃이 되고 있는 저 여자 제 꼬리를 문 물고기 같은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를 지닌 저 여자 '안개라는 건 누군가가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십자말풀이처럼 안개를 사용하던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안개를 끓여 모유처럼 배부르게 먹이던 여자 그 안개에선 극지까지 다녀온 바람의 냄새가 나고 말라죽은 나무의 이야기가 우러났다 그 안개를 '사랑'이라고 사용한 건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안개가 열일곱 묶음의 안개꽃이 된 건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이별의 재구성 / 창비, 2009. 9. 22.
[시인의 말]
내 슬픔에게 접붙인다.
감히 나는 이 가을이 너무 좋구나
감히 나는 살아 있구나
감히 나는 너를 사랑하는구나
감히 나는 눈물을 떨구는구나
감히 나는 목숨이 저 봄 같기를 소원하는구나
감히 나는 시시하구나
감히 나는 안녕하구나
감히 나는 시를 쓰는구나
부러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존재로 인해 고통밭았던 여인들
무덤 속에 있는 엄마와 태백에 있는 엄마
내 삶과 죽음의 공양주 보살들에게
'감히' 이 시집을 바친다.
2009년 9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안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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