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外界

[스크랩] 신작소시집/물결치는 밭 외 4편

초록여신 2009. 5. 12. 21:15

물결치는 밭 외 4편

 

밭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알발로 다졌던 운동장이

종대로 고랑이 패여

들깻잎과 콩잎이 나란했다

쥐똥나무 울타리 너머 밭이 된 운동장은

지나치고도 눈길을 끌었다

풀 우북한 운동장을 보다 못해

갈아엎은 이 억지가

가볍게 가속 페달을 밟게 했다

바람은 이제 빨래판처럼 물결치는 중

그러니 바람은 밭에서 세탁되는 셈

플라스틱 스레트 스무 장과 양회 두 포를 내려놨다

―내 죽는다고 누가 내리와 살 것도 아니구 프리스틱이래도 한 십 년 안 가것나?

골진 운동장의 바람은 과속방지턱 앞의 차처럼

지정지정 물결쳤다, 사열대 앞의

옥수수 잎은 앞으로나란히 하고 있었다

골라낸 돌무더기가 돌탑 울타리가 된

노인의 노동이 희망이다

학교는 밭이 되고

이혼 가정이 늘어 촌에 애들이 늘어나는

억지가 희망이다

억지도 엄연한 생의 일부분

제 잎 말려가면서, 아니 말라가야

열매 달고 알 굵쿠는 것들

미노리 배달 다녀오는 길이었다

상장을 받은 것처럼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라진 어린이 보호구역 지나

제물에 과속했다

 

 

윤관영 부르기

—90년 중반 민작회원이 되었을 때 기이하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살갑게 불러 준 이가 현기영 선생이었다. 신출내기인 나를 기억하고 이름 불러주는 소설가 선생, 미스테리였다. 선생의 소설 「소드방놀이」에서 윤관영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가닝아! 가닝아!

파동 없이 직방으로

어린 내 귀에 꽂히던 어머니 소리

물속에서 숨을 참듯 사레 들린 몸의 지점에는

날 부르는 소리가 있다

간용아, 니가 엄만테 잘해야 도ㅑ 막내이모 소리

여, 이놈아! 그저 안타까운 아버지 소리

요사이 내 호칭을 잊은 어머니 소리

시멘트 육백 포 내리러 가는 트레일러 속에서 들었다

넘으 돈 묵기가 그리 만만한 줄 아러

가닝이 말고 큰아가 이제사 알아먹은 말

민주아빠… 낯 뜨거운 윤 시인님

과녕이 성에, 선생님에 이어

노래방 사장까지 왔다 내가 날 검색하면

윤관,만 쳐도 ‘영정’과 ‘장군묘’가 달라붙고

윤관영,을 쳐도 ‘정’이 달라붙는 나

나는 둔해 터져 숨 못 쉬는

죽을 지경이 되어야만

날 부르는 여타 소리를 듣는다

그제야 그 장면이 들린다

 

어떤 때는 내가 날 불러 본다(싱겁게)

여어, 이 놈아(어떤 땐

낯 뜨겁게도 잘 들린다)

 

 

고수대교 연가

 

그 애는 첫사랑

무릎 나란한 책 읽기를 맞갖아 했다

언젠가 그 애가 영혼(靈魂) 읽기를

난 왜 이 글자가 운괴(雲槐)로 보일까 했다

또 한 번은 정오(正午)를, 순간

오천(五千)으로 읽어 날 웃겼다

그 愛는 내 첫사랑

다리가 보이는 터미널 아래

낚시점 앞에서 눈주었던 첫키스

정오는 아니었고 자정 무렵이었다

고수대교는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그 애는 첫사랑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무릎 위에 책 놓은 애를 보면

한 번 더 보게 된다 남한강처럼

오천 년은 갈 영혼의 사랑

터미널에 가면 고수대교가 보이고

고수대교를 보면 내 늑골에 안쭝잡은

그 애의 영혼이 만져지는 듯해,

세워 둔 차의 열쇠를 확인하듯

내 갈비께를 더듬는다

 

가까이 내 갈비뼈

고수대교가 보인다

올라가면 雲槐층층 천동이요 좌회전하면

영영한 봄 영춘이다.

 

 

밭가의 자귀나무

 

순간의 상처가 평생 간다

도끼날 맞은 듯한―

 

한 가지가 찢어진 자귀나무는

상처가 오그라들어 음문 같다

언덕배기에 있다는 점에서 운명 같고

돌아서 나올 때 돌올하다는 점에서

농로처럼 뒤끝이 꾸붓꾸붓하다

 

어릴 적 상처가 평생 간다 도끼 맞은 듯한 나무

찢어진 반대편으로 줄기가 뻗어나가

상처가 더 오롯하다

 

도끼질은 옹이 반대편을 찍어야

옹이를 피해 벌어져 장작이 된다

헛찍으면 장작은 곤죽이 된다, 그러니까 저 나무는

 

상처 위에

상처가 들어올리는 힘으로 서 있는 셈

상처는 흔적이 평생 가기에 상처다

 

밭가의 자귀나무는 뿌리 위에

돌마저 수북하게 얹혔다

 

 

꽃 3

 

제 손길로는 아니란다

불안커나 두려울 때 간지럼을 탄단다

꽃에게 꽃은 약한 부위,

단박에 피워 낼밖에

바람이 간지럼 먹여 피는 꽃은 꽃의 웃음

꽃은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 지쳐 진다

간지럼은 요지부동을 깨우는 것

제가 제게 간지럼 먹이는 自慰의

인간은 그래서 슬픈 種族

꽃은 통짜로 흔들린다

통짜배기 떨어져라 꽃

가녀림은 바람을 덜 타려는 꽃의 속셈

바람과 같이 흔들리려는 술수

바람의 희롱은 사시장철,

양귀비를 보면

바람이 어떻게 간지럼 먹이는지 알 수 있다

꽃은 종내 꽃의 죽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간지럼은 눈물 나는 웃음이어서

죽음은 죽어서

입처럼 오그라든다

 

 

詩作노우트

 

_詩

 詩 외의 것은 非詩다. 詩는 정확하게 둘로 나뉘어진다.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 중간은 없다. 어중간한 시는 좋지 않은 시에 속한다. ‘실패한 시는 있을 수 있어도 불성실한 시는 있을 수 없다’는 김수영의 말은 시인의 자세를 두고 한 말이지만 ‘실패한 시’ 중에는 좋은 시가 있을 수 있어도 ‘불성실한 시’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시가 있을 수 없다.

 내가 詩作에 들이는 공이라는 것, 일테면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이나 각고의 노력이냐는 自問도-기준의 정도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장치를 해도 시에 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는 사실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_四字聖語

 최근에 몇 개의 사자성어가 크게 다가왔다.

 하나는 애이불상(哀而不傷)으로 사전적 의미는 ‘슬퍼하되 정도를 넘지 아니’하는 것으로 ‘슬픔을 사사로운 슬픔으로부터 맑게 침전시켜 객관적 슬픔으로 승화시킨 데서 유로되는 정조로 해석한다’고 나와 있다. 나는 이 말을 시에 있어서 감상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로 읽었다. 다른 하나는 낙이불음(樂而不淫)으로 ‘즐기기는 하나 음탕(淫蕩)하지는 않게 한다는 뜻으로,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뜻’한다고 나와 있다. 시마(詩魔)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 수 있으나 極道에 이른다는 것이 狂은 아니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물론 나의 해석이다. 공히 이 두 사자성어에는 <환기된 서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애(哀)든 낙(樂)이든 삭혀 걸러진 것이어야 한다 말.

 시의 형상화와 관계된 사자성어로 날 후려친 것이 있으니 바로 입상진의(入象盡意)다. ‘형상을 세워서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한다’는 뜻으로 바로 시에서의 形象化의 다른 말이 아닐까 한다. 의미를 돌려 말하는 이미지가 입상진의의 주축이다.

 최근에 개인적인 체험으로 각인된 사자성어로 낙선사례(落選謝禮)라는 말이다. 어릴 적 선거직후 꽤 보았던 글귀로 요즘은 볼 수가 없는 말이다. 낙선사례라는 말은 말 그대로 풀이 하자면 낙선한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신을 지지한 사람에 대한 인사이자 또한 패배하게 만든 사람의 가르침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한다는 뜻이니, 실로 쓸 수 없는 - 절대 낙선할 만한 사람이 아닌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한다. 최근에 나는 처녀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을 내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도서 최종심까지 가서는 떨어졌다. 앞전에 신청했던 문예진흥기금도 수혜하지 못한 이후의 일이라 어떻게 나는 떨어지기만 하냐는 자탄이 깊었다. 이제 분노의 결도 죽어 시에 결곡한 마음으로 낙선사례(落選謝禮)를 올린다.

 나는 기계지심(機械之心-간교하게 속이거나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버리고 회사후소(繪事後素-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뜻으로,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의 마음으로 시 자체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해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마음인 기계지심(機械之心 )은 창작 이전이고 애이불상(哀而不傷)과 낙이불음(樂而不淫)은 창작시 경계해야 할 마음이다. 시 창작은 회사후소(繪事後素) 후에 입상진의(入象盡意)를 세워야 좋은 시가 탄생한다. 내겐 정말이지 四字의 聖語가 아닐 수 없다.

 오태환 시인의 『경계의 시 읽기』를 열독해 얻은 것들이다.

 

_ 달집 태우기

 방범대원들과 달집에 들어가는 나무를 하러 애곡에 갔다. 응달엔 아직도 눈이 많은 그 곳을 1톤 화물차를 몰고 가, 간벌을 하여 놓은 나무를 가져 왔다. 두 명이 엔진톱으로 잘라 나가면 앞장선 조가 산 아래로 던지고 아래 쪽 대원들이 받아서 트럭에 실었다. 물경 다섯 대 분량의 나무를 해다가 달집 태우기 행사를 할 수변 공터에 부렸다.

 점심을 먹고 대나무를 베러 장림리로 갔고 나머지 패는 단봉사 입구로 가서 밤나무와 낙엽송을 잘라 왔다. 한 차씩 해오고는 도로를 넓게 절개할 곳으로 몰려가 솔가지를 두 트럭분이나 찍어 왔다.

 5m가 넘는 달집은 크레인이 와서야 그 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안에 젖은 나무를 넣고 긴 기둥이 되는 나무를 팔각으로 세우고 마른 나무를 그 안에 차곡차곡 세웠다. 솔가지를 달집 위쪽에 꽂고 대나무로 전체를 감싸고서야 달집은 완성되었다.

 방범대원들은 내남없이 열심이었다. 풍년과 소원성취를 이룬다는 달집. 개인택시를 하는 대원, 임대 노래방을 하는 대원, 전파사를 하는 대원,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대원, 식당을 하는 대원, 1톤 트럭으로 날일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대원들. 대체 무슨 소원을 빌까. 어떻게 되는 것이 풍년인가. 나 자신도 빌 소원과 기대할 풍년이 마땅치 않았다. 소원을 빌면서 소원성취가 소원인 사람들, 무병장수, 가족 건강, 가족 화목이라 적은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환이 도둑이니까 몸뚱이만 성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인지, 그런 것인지, 매달린 소원들을 보면서 나는 소원을 매달지 못했다.

 점화봉을 들이대자 하얀 솔가지 연기가 하늘 닿게 오르고 진공 상태인 대나무가 터지면서 나는 소리가 겁나게 컸다. 그 소리에 악귀가 물러간다는데 액 속에 사는 생에게 액땜이란 무엇일까? 생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액땜인 것인가.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멀찌가니 서서 겁나게 날리는 불티를 보면서 소원 없는 사람들의 소박한 소원을 알게 되었다. 민중이 역사라는 말을 체감했다. 소원이란 잘못하면 개인의 욕망이기 쉬운 것,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힘의 근원이요 역사의 동력이 아닌가 싶었다.

 시골에서는 누구라도 별수없다. 나라고 별재간이 있는 게 아니다. 하루에 한 팀도 없을 때가 많은 임대 노래방이지만 열심을 내야 한다. 이제 봄이 되면 낮에는 날일도 나가 묵은 빚도 갚고 해야지, 다짐두어 본다.

저 날리는 불티 사이로 대보름 달이 밝다.

 

_고기잡이

 수석가게 장 사장과 동양화 그리는 이 화백과 노래방 앞 개울에 가서 고기를 잡아 왔다. 지렛대로 돌을 들추면 고기는 추워서 물살에 밀려 족대로 들어왔다. 추울 때 고기들이 돌 밑에 숨어 겨울을 나듯, 개울 돌이 허리춤에 얼음을 매달 듯 나도 이 겨울을 다만 견뎌야 한다.

 

_지면

 내가 관여하는 잡지에 시를 발표하자니, 부끄럽고 겸연쩍다. 시가 좋아야 하는데, 시작노트도 어지간해야 하는데, 이러저런 생각으로 부담 곱절이다.

 

 

시골 살이 혹은 시 살이

-자기응시로서의 시

 

                  전해수(문학평론가)

 

 충북 단양 대잠리에 한 시인이 산다. 그는 산세 좋고 인심 좋은 시골로 들어가 촌놈을 자청하며 시골 살이에 폭 빠져 있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최근 그가 소일하는 일은 수석가게 장사장과 동양화 그리는 이 화백을 꼬드겨 고기잡이를 하거나, 지킬 것이나 무에 있을까 싶은 시골의 자칭 방범대원들과 달집에 들어가는 나무를 하고, 그것으로 달집 태우기를 하는 것. 시인이 즐겁게 어울리는 이들 단양의 동네 처자 혹은 사내들은 전파사 주인이거나 철물점을 지키거나 개인택시 운전수, 식당 주인, 하루 일품을 파는 이들이 대부분이며, 밥이 안 되는 시를 쓰는 시인은 임대 노래방을 운영한다. 그랬다. 숨 막히는 도시에서 (자연과, 자연 속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숨통 트이는 시골로 삶의 영역을 전환한 시인.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관영 시인의 시골 살이는 시(詩)를 삶으로 받아들여 온전히 시 안에서 시를 먹고 마시고 배설하려는 시인의 궁극점, 즉 시(詩) 살이 같다. 그것은 변방의 낮은 움직임이어서 때로 애이불상, 낙이불음, 낙선사례 같은 애(哀)와 불(不)과 낙(落)이 가득한 세계로 인식, 시인의 소외감을 애처로이 느끼게도 하지만 ‘슬퍼하되 정도를 넘지 아니’하려는 시인의 자력(自力)과 ‘도를 지나치지 않’으려는 겸허함과 낙선의 아픔을 겪은 시인의 자기응시가 강하게 내재되어, 청풍농월 풍류나 즐기고 있는 시골 살이의 여유로움 보다는 삶의 고군분투를 겨우 빠져나온 촌부의 한숨 돌리기 같기만 하다. 그의 첫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에도 회사후소(繪事後素: 본질이 있는 연후에 꾸밈이 있다)하려는 자기응시, 즉 도처에 산재한 시인의 시골 살이 혹은 시(詩) 살이가 잘 드러나 있는데 이번 신작시들 역시 이러한 시골 살이 가운데 자의식이 충천한 시인의 시세계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호명(呼名)’을 통한 자기응시이다.

 

가닝아! 가닝아!

파동 없이 직방으로

어린 내 귀에 꽂히던 어머니 소리

물속에서 숨을 참듯 사레 들린 몸의 지점에는

날 부르는 소리가 있다

간용아, 니가 엄만테 잘해야 도ㅑ 막내이모 소리

여, 이놈아! 그저 안타까운 아버지 소리

요사이 내 호칭을 잊은 어머니 소리

시멘트 육백 포 내리러 가는 트레일러 속에서 들었다

넘으 돈 묵기가 그리 만만한 줄 아러

가닝이 말고 큰아가 이제사 알아먹은 말

민주아빠… 낯 뜨거운 윤 시인님

과녕이 성에, 선생님에 이어

노래방 사장까지 왔다 내가 날 검색하면

윤관,만 쳐도 ‘영정’과 ‘장군묘’가 달라붙고

윤관영,을 쳐도 ‘정’이 달라붙는 나

나는 둔해 터져 숨 못 쉬는

죽을 지경이 되어야만

날 부르는 여타 소리를 듣는다

그제야 그 장면이 들린다

 

어떤 때는 내가 날 불러 본다(싱겁게)

여어, 이 놈아(어떤 땐

낯 뜨겁게도 잘 들린다)

                                                                                                                                                           -「윤관영 부르기」전문

 

 그 호명은 “가닝아”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간용아” 막내이모 소리, “이놈아” 아버지 소리, 또 “민주 아빠” 아내 소리, “윤 시인님”, “노래방 사장” 등 시인을 부르는 여타 소리들로 다양하지만, 그 내면의 성질은 같은 속성을 지닌 것들이다. 그러나 호명이란 “파동없이 직방으”로 “몸의 지점에”서 “꽂히는” 소리 아닌가. 호명 때문에 “숨 못 쉬고 죽을 지경”이 된 그는 검색창에 검색을 해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부르는 소리 무엇인가.

 “윤관, 만 쳐도 ‘영정’과 ‘장군 묘’가” 불쑥 튀어나오고 “윤관영,을 치”면 “정”이 따라 붙는 ‘영정(影幀)’과 ‘묘(墓)’ 사이에서 나는 대체 누구인지, 살아있기나 한 것인지 스스로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어, 이 놈아”처럼, 싱겁지만, 많은 호명들 가운데 가장 잘 들리는 소리는 스스로 자신을 응시하는 소리이며, 이에 비로소 살아있음의 “낯 뜨”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시인의 자기응시로서의 시(詩) 살이는 ‘회상(回想)’을 통해서도 실현된다.

 

고수대교는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그 애는 첫사랑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무릎 위에 책 놓은 애를 보면

한 번 더 보게 된다 남한강처럼

오천 년은 갈 영혼의 사랑

터미널에 가면 고수대교가 보이고

고수대교를 보면 내 늑골에 안쭝잡은

그 애의 영혼이 만져지는 듯해,

세워 둔 차의 열쇠를 확인하듯

내 갈비께를 더듬는다

                                                                                                                      -「고수대교 연가」부분

 

 첫사랑 그 애와 무릎 나란히 앉아 책을 읽던 기억 속에서 영혼(靈魂)을 운괴(雲槐)로 잘못 읽고 정오(正午)를 오천(五千)으로 읽는 터무니없던 “그 愛”. 그 사랑(그 愛)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웃음 주는, 내 갈비뼈의 앙상한(!) 형태처럼 내 늑골에 “안쭝잡”고 있는 ‘첫’사랑이자 ‘오래된’ 자신에 대한 응시와도 같다. 가고 오는 무수한 길들이 펼쳐진 “터미널”에 대한 기억은 “남한강”처럼 “오천(五千)”년 갈 “영혼(靈魂)”의 “갈비뼈”가 된 고수대교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은 그 애의 영혼을 만지듯 내 갈비뼈로 옮겨와 몸의 일부를 고수하고 있는, 내 몸(갈비뼈)으로 응시하는 “그 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연상 작용은 고수대교→첫사랑→갈비뼈로 이어지면서 “세워둔 차의 열쇠를 확인하듯 내 갈비께를 더듬”는 행위로 나아가는, 자기응시를 향한 연결 구도를 보여준다.

 

밭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알발로 다졌던 운동장이

종대로 고랑이 패여

들깻잎과 콩잎이 나란했다

쥐똥나무 울타리 너머 밭이 된 운동장은

지나치고도 눈길을 끌었다

                                                                                                               -「물결치는 밭」부분

 

 그러나 시인의 자기응시는 내부에 갇혀있는 자의식적 자기응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향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자기응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학교운동장이 밭으로 변한 사연이,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한둘씩 늘어간 시골의 현실에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시인의 “눈길을 끄는”이유란 것에 있다. 즉, 시인이 “아이들이 알발로 다졌던 운동장”에 “고랑이 패여 들깻잎과 콩잎이 나란”한 것을 무심코 “지나치”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끌어당기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외부세계로부터 열린 자기연민 즉 자기응시의 일면을 느낀 것이다.

 

제 손길로는 아니란다

불안커나 두려울 때 간지럼을 탄단다

꽃에게 꽃은 약한 부위,

단박에 피워 낼밖에

바람이 간지럼 먹여 피는 꽃은 꽃의 웃음

 

-중략

간지럼은 눈물 나는 웃음이어서

죽음은 죽어서

입처럼 오그라든다

                                                                                                               -「꽃 3」부분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의식 역시 외부세계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자기응시’의 세계이다. “제 손길이 아”닌 외부로 인해 “간지럼을 타”고 “바람이 간지럼을 먹여” 피는 꽃이야말로 “약한 부위”이지만 종국에 이 웃음은 “간지럼”때문에 “눈물나는 웃음”이며, “죽어서 입처럼 오그라”든 “약한 부위”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 “꽃에게 꽃은 약한 부위”라는 명제는 “꽃의 웃음”이 “오그라든” 죽음이라는 역설과 만나, 겸허한 자기응시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다. 애초에 시인의 시(詩) 살이는 애(哀)와 불(不)과 낙(落)이 가득한 세계였으며 ‘슬퍼하되 정도를 넘지 아니’하는 시인의 자력(自力)과, ‘도를 지나치지 않’으려는 인내와, 낙선의 아픔을 소화시키는 자의식적 자기응시가 충만한 세계였다. 바로 시인의 시골 살이 처럼.

 

전해수 :

2005년『문학선』평론 당선.

동국대 문학박사. 동국대 문화학술원 연구교수.

저서 『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2006, 역락)

 

계간 <미네르바> 여름호

출처 : 어쩌다, 내가 예쁜
글쓴이 : 也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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