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나의 고래를 위하여 [정일근]

초록여신 2009. 3. 25. 11:29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전생(前生)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 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새으이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 싶다, 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 는 그 말이 고래다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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