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분홍 꽃 팬티 [정일근]

초록여신 2009. 3. 24. 11:26

 

 

 

 

 

 

 

 

 

 

어머니 병원 생활하면서

어머니 빨래 내 손으로 하면서

칠순 어머니의 팬티

분홍 꽃 팬티라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꽃피던 이팔청춘

아버지와 나눈 사랑의 은밀한 추억

내가 처음 시작된 그곳

분홍 꽃 팬티에 감추고 사는

어머니, 여자라는 사실 알았다

어느 호래자식이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나

성(性)을 초월하는 거룩한 존재라고

사탕발림을 했나

칠순을 넘겨도

팔순을 넘겨도

감추고 싶은 곳이 있다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여자다

분홍 꽃 팬티를 입고 사는

내 어머니의 여자는

여전히 핑크 빛 무드

그 여자 손빨래하면서

내 얼굴 같은 색깔로

분홍 꽃물 드는데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문학과지성사, 2009. 3. 12.

 

 

 

칠순 넘으신 내 어머니의 팬티도 진분홍빛 꽃 팬티였다.

딸인 자식에게조차 부끄러워 속옷을 내비치기를 거부하던,

엄마도 그런 이팔청춘의 여자였다.

우리는 왜 몰랐을까?

나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진분홍빛 꽃 팬티를 손빨래하던 여동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여자인 엄마.

20대 꼿꼿한 허리로 아버지와 환하게 미소짓던 흑백사진 속의 엄마는 앨범 속에 살아계신다.

그 흑백사진 속에 엄마의 이팔청춘이 숨쉬는 것이리라.

오래오래 진분홍 꽃 팬티의 수줍음으로 함께 존재해주시길 바란다.

나이들수록 고운 색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사드리자.

이왕이면 분홍 꽃 팬티면 더 좋겠다.

(엄마의 진분홍 꽃 팬티 속에서,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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