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슬픔은 여왕처럼 교만해 [이혜영]

초록여신 2009. 2. 8. 21:25

 

 

 

 

 

 

 

 

 

 

 그 여자 아주 느려 골방에서 혼자 사라방드 춤이나 추지 고개를 수그리는 일이라곤 없지 목과 허리에 빳빳한 골판지를 대고 그 여자 종일 지루한 사라방드 춤이나 춰 창백한 장미 입술 새카만 가시들 물결처럼 스칠 뿐 그 여자 허벅지를 찌르지 않아 다 피어버린 가시들이야 캄캄하지 않으니까 속살 깊이 박힌 것 보이지 않지 가느다란 목덜미 깨끗하게 빗질해 올린 어스름 길들 다시 푸른 눈썹 치켜들고 걸어 썩을수록 환해져 그 여자 투명해 보이지만 달콤하지도 알코올처럼 콕 쏘지도 않아 순도 높은 여자란 없지 오래도록 가두어둘 수 없으니까 그 여자 사라방드 춤이나 춰 갈피갈피 해묵은 책장 펼쳐볼 때가 있지 어쩜 이렇게 소롯이 살아 있을까 말라버린 강물 위로 그 여자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지 고치 속의 나방 같아 동그랗고 단단한 껍질 깨고 기어나오지 참 질기고도 유연해 그 여자 느릿느릿 사라방드 춤이나 추면서

 

 

 

 

 

* 저녁 6시의 나비, 세계사(1999)

 

 

 

.......

1, 500원 주고 시집을 샀다.

어찌 이런 행운이.

서점 한 공간에 중고책들을 싸게 팔고 있었다.

시집은 조금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난 교만한 여왕처럼 춤추는 시집을 모셔왔다.

느릿느릿 책꽂이 빼곡빼곡 꽂힌 책들을 빠른 눈빛으로 읽으며,

동그란 안개 껍질을 깨고 나의 곁에서 오래오래 세 들어 살기를 바래본다. 사라방드 춤을 추면서...

기다려라,

그곳에서 기쁨의 탱고를 추는 교만한 왕을 모셔올 테니까...

언제쯤인지는 모르겠다.

(행운의 시집 앞에서,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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