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아무것도 아닌 편지 [이병률]

초록여신 2008. 10. 12. 09:06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적힌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움큼 쏟아놓은 어느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채라도 지어올리기를 바라자며 내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 바람의 사생활, 창비(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