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서른여섯 살 꽃 [김사이]

초록여신 2008. 9. 25. 23:11

 

 

 

 

 

 

 

 

 

 

병원을 휘젓고 다니는 그 여자는

무심결에 켜놓은 TV처럼 홀로 시끄럽다

시원하게 터진 눈과 이마가 돋보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 여자는

전국노래자랑에도 출연하고 대통령도 만나고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휠체어를 잘도 굴리는 그 여자는

두 다리로 걷는 사람들보다 빠르다

스무 살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어도

갉아 덧난 상처는 없다

한 손은 브레이크 또 한 손은 액셀러레이터로

유치원 통학버스를 운전했던 그 여자는

파릇파릇하다

아이를 낳지 못해도

반몸뚱이로 붉은 꽃물 쏟아내며

맑은 빛을 생산하는 여자의 웃음은

아픈 곳이 싹 나은 것처럼 가슴 뻥 뚫리는 처방전

늘상 일을 찾아 움직이는

그 여자는 내 이름과 똑같다

같은 이름이라는 것 하나로 우연히 다가와

꾹꾹 눌러둔 내 음습한 욕망덩어리를

발가벗기는 그 여자

앞에서 웅크린 고슴도치가 되어 온 가시들을 세우고

막무가내 경계를 해보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2008)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는 나무로 [이태수]  (0) 2008.09.26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0) 2008.09.25
유령 난초 [김선우]  (0) 2008.09.23
반성하다 그만둔 날 [김사이]  (0) 2008.09.23
개심사 [김사이]  (0) 2008.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