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백상아리 레퀴엠 [문혜진]

초록여신 2008. 7. 15. 13:33

 

 

 

 

 

 

 

 

신이 나에게 무심해졌으면 좋겠어

너는 미술관에서 새로 산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가 부패해

리콜한 상태라고 말했지

네 개의 흰 벽을 가득 메운 맹금류

날개 편 박제들

자고 일어나면 동쪽 거실 벽에서

태양의 사제처럼 돌진하는 거대한 백상아리

한 마리 기르고 싶어

눈을 뜰 때

거대한 유리 수조에 방부 처리된 상어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면

아침마다 죽음을 환기시키는 신성한 의식

핏빛 카펫 위로

푸딩 밴드의 발랄한 레퀴엠이 흐르고

내 배에 뿌려진 인간 최초의 페인팅을 감상하며

사람도 집도 날아다니는 새도 없는 곳으로

환각의 순례를 떠나야지

인생의 얄팍한 수가 보이지 않도록

부패한 것들을 리콜할 수 있다면

죽은 살 아래

아직 싱싱한 붉은 살덩어리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기 전

죽은 자의 영혼을

봉합되기 이전의 상처를

갑자기 외계의 쓸쓸함 속으로 달아나는 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매혹적인 육체의 죽음인가!

 

 

 

 

* 검은 표범 여인, 민음사.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구는 성실하다 [김영승]  (0) 2008.07.16
꽃 지는 저녁 [정호승]  (0) 2008.07.15
비 [황인숙]  (0) 2008.07.15
강 [황인숙]  (0) 2008.07.15
고래를 기다리며 [안도현]  (0) 2008.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