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서푼짜리 시 [박정대]

초록여신 2023. 4. 26. 08:59

서푼짜리 시
박 정 대





세상이 거대한 관공서 같다면 관공서 문을 열고 햇살 환한 거리로, 광장으로 담배 피우러 나가듯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자

그곳은 고독이 눈발로 흩날리는 곳

관공서의 문을 열면 거기는 이식쿨 호수 뜨거운 가슴들시 모여 있는 물의 광장

창문을 열고 키르기스스탄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눈발굽의 소리를 듣자

바람이 몰고 가는 세상의 음원들 물음표 같은 우리 귓바퀴에 한 짐 가득 모아두고 기나긴 겨울밤이면 시래기 된장국 끓이듯 조금씩 끓어오르는 내면의 음원을 듣자

세상에서 내가 발견한 음원의 원소주기율표를 그리다 보면 새들이 몰려와 마음 가득 폐곡선을 그리며 지나가리니 고독은 한 양푼의 비빔밥

고독을 비벼 먹으며 한겨울을 나자

이상 기후의 날들 속에서도 나의 담배 연기는 오롯이 검은 밤의 비파를 연주하리니 어둠이 무너지며 쌓이는 인간의 골짜기마다 음악은 함박눈의 증거로 남으리니

침묵이 쟁취하는 위대한 고독

고독이 앞장서는 위대한 사랑

침묵이 쟁취하고 고독이 앞장서는 사랑의 최전선에 삶을 두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냉혹과 멸시의 땅에 한 줄기 담배 연기를 깃발처럼 펄럭이며 한 나라를 세우면 그 나라의 밤을 온통 덮으며 달려오는 순결의 눈발굽 소리 들리리니

여기는 서푼짜리 고독의 땅

고독의 별 아래 날마다 새로운 음원이 탄생하는 땅


《체 게바라 만세》(달아실, 2023)


새로 복간되어 나왔지만,
여전히 완독이 불가능한 시집이다.
표지색 또한 묵직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박정대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사회를 향한 혁명의 목소리는 전쟁과 경쟁을 위하지 아니하고 단지 시민이, 국민이, 내가 숨쉬고 있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벽에 부딪히기에 고독하고 외로운 게 아닐까 싶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은 "서푼짜리 시"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결코 그 가치는 가볍지 아니하다.
그저 시에게 편하게 다가서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 쯤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체 게바라 평전>도 읽었지만 내용은 까마득하고
<체 게바라 만세>(실천문학사)도 읽었지만 내용 또한 생각나지 않아 새옷을 입은 시집을 펼친다.
여전히 길고 길다.

여기는 시사랑.
고독하지 않고, 날마다 시가 쌓이는 곳이다.

시사랑 만세를 부르며 "사랑과 혁명의 시인", "시를 혁명하고자 하는 시인"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길어서 어렵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