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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배영옥]
초록여신
2022. 12. 21. 11:27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배 영 옥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안다고들 한다
그 말이 단순히 숟가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천명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 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따닥따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아이는 상 위에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가지런히 놓고 있다
눈대중으로 숟가락 숫자를 헤아려본다
가장 귀중한 숟가락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잃었다
_《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문학동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