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인생공부 [유하]

초록여신 2022. 10. 5. 08:09


체중계의 바늘이 0을 가리키는
내 몸무게에 깜짝 놀라
당장 시작한 벤치 프레스
하나 하나 늘려가는 바벨의 중량 덕분에
풍선 바람 나가듯 빠지는 살도 살이지만
신기하여라
그 무심한 쇳덩어리들이
손 시린 인생공부를 시킨다



새로운 무거움을 접하며
비로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전 단계의 무게에서
깔짝깔짝 역기를 농락하던 나는
얼마나 초라한 비계덩어리에 불과했던가
바벨을 하나 하나 늘릴 때마다
나의 자만은 살이 빠지듯
내 몸을 서서히 빠져 나간다



가령 바벨을 늘리지 않고
그 다음 단계의 무거움을
짐작하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듣는 귀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들어올리는
타성에 젖은 중량의 권위로
쉽게 잴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새로운 중압감의 고통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일쯤이야
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바벨을 하나씩 늘리다 보면,
세상에 뻔한 이야기란 없다
당장 올려놓은 낯선 쇳덩어리의 무게가 나를 압사시킬 듯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뻔한 것은,
조금만 무리하게 바벨의 무게를 늘려도
쉬 짓눌려 버리는 우리 자신들이다
지금 보잘것없는 무게에도 쩔쩔맨다고 하여 그를
무지렁이라 비웃지 말라
새로운 무거움의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 하나, 바벨을 견딜 수 있으리니
하나앗 둘……
하나아앗 두울……



_《무림일기》(중앙일보사, 1989)